손뜨개의 아이콘 박물관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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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뜨개의 아이콘 박물관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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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11.0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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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바늘이야기의 바늘이야기 송영예 대표
     
▲ (주)바늘이야기의 바늘이야기 송영예 대표 캐리커쳐 원소정 작가

실뜨개 책으로 25만부를 판매한 전설의 여성CEO
우리나라에서 손뜨개를 프랜차이즈화 해 개인의 취미를 문화로 격상시킨 혁신의 아이콘, 전문작가도 아닌 이가 손뜨개 관련 서적을 무려 15권이나 내고 그중 한 권이 25만부라는 경이로운 판매를 기록하게 한 베스트셀러 저자, 게다가 자신이 지은 책을 번역해 해외에 수출까지 한 강단 있는 리더, 15년 전 일본 실에 갇혀있던 국내에 유럽 실을 처음 갖고 와 업계를 충격에 빠뜨렸던 파이오니아, 상상할 수 없었던 손뜨개 관련 협회를 고군분투하며 설립한 여장부, 손뜨개를 작품으로 형상화하기 위해 아카데미를 처음 만든 이, 540평 규모의 대지에 손뜨개 관련 복합문화공간을 국내에 처음 세운 장인 기질의 여성CEO. 격전장과 같은 외국의 유명 실 브랜드 쟁탈전에도 불구하고 한 브랜드와 15년 동안 협력을 유지하고 있는 신뢰의 주인공. 1인 기업에서 30억원의 매출을 올린 입지전적인 인물.

손뜨개 업계에서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바늘이야기>의 송영예 대표(50)는 창조적이고 특출한 능력의 여성CEO로 불린다. 종가집 가정주부에 불과하던 그가 치열한 경쟁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사회에 생존을 위해 나오게 된 배경도 그렇고 고비 고비마다 특유의 안목과 과감한 실행력으로 어려움을 헤쳐 나오는 과정 역시 리얼하다 못해 찡하다. 송 대표는 어떤 경영비법으로 손뜨개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업인이 되었고 유명 여성CEO의 반열에 올랐을까. 
그는 어떻게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실 유통분야에서 이들의 거친 텃세를 이겨내고 오늘에 이를 수 있었을까. 손뜨개 박물관이라는 그의 원대한 꿈은 과연 이뤄질 수 있을 것인가.  
고요와 침잠이 넉넉히 자리하고 그 곁에 단단함과 단호함이 겹겹이 둘러싸인 깊은 눈매가 주는 매력은 흡입력이다. 조신스러운 동선과 어울리는 나긋한 대화법은 상대방의 경계의 선을 빠르게 걷어내게 하는 놀라운 또 하나의 몸 언어다. 적지 않은 나이에 아직 다 가시지 않은 수줍음을 간혹 발견한다는 건 여전히 그의 순수성이 몸에서 가시지 않았다는 방증이 아닐까. 수줍음은 겸손의 끝에서 나오는 미완의 몸짓이다. 솔직담백하고 가식이 묻어 있지 않은 말씨는 문득 까칠함을 연상하지만 그만큼 상대방의 신뢰를 얻는 데에는 그만이다. 그가 지금 그걸 말하고 있다. 미인소리를 자주 들을법한 얼굴이다. 진짜미인은 매력을 풍긴다. 그는 어떤가.

▲(주)바늘이야기의 바늘이야기 송영예 대표 ⓒ사진 이현석 팀장

종가집 가정주부가 마주친 컴퓨터 1대
얌전한 모범생으로 현모양처를 꿈꿨던 송 대표는 회계사 사무실, 고려대 교직원 등에서 근무하다 27살 되던 해 외삼촌의 중매로 결혼한다. 1년에 8번의 제사를 지낼 만큼 종가집이어서 아이 키우고 살림살이 하는 것만으로도 빠듯했다. 하지만 그는 부지런함을 어릴 적부터 타고난 이였다. 아이들의 태교를 위해 틈틈이 손뜨개를 어른들 어깨너머로 배운 그는 시아버지 몰래 양재도 조금씩 익힌다. 
어릴 적부터 요리와 옷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짬이 나는 대로 연습했다. 홀로 된 시아버지 밑에서 호된 시집살이를 하던 시절이었다. 젊은 며느리를 제대로 가르쳐야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어느 날 출근을 하면서 시아버지께서 양복을 내놓고는 소매를 줄여놓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틈틈이 양재를 배웠긴 했지만 양복까지 줄일 실력은 아니었다. 양재학원에 다니면서 주변 분들한테 물어보면서 결국 해내고 만다. 자존감이 강했던 송 대표는 이 일로 시아버지한테 타박을 듣는 게 싫었다. 오기로 일을 마친 그는 양재학원을 1년6개월이나 더 다닌다. 
그러던 어느 날 결혼한 지 2년이 다 됐을까. 못 보던 컴퓨터 한 대가 집에 들어온다. 지방에 사업차 가는 날이 많았던 남편이 심심할 때 갖고 놀라고 갖다 놓은 것이었다. 비싼 컴퓨터처럼 보였다. 송 대표는 그러나 1994년 당시 그의 나이 28살이었던 시절 컴퓨터 문외한이었다. 그러나 우연히 마주친 이 컴퓨터 한 대가 훗날 그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게 될 지 누가 알았겠는가. 그렇게 1년가량 컴퓨터를 책상위에 썩히고 있을 무렵 중앙일보에 PC통신 관련 이야기가 나온 것을 보게 된다. 

우연히 본 PC통신 기사........인생의 전환점이 될 줄이야
거기에는 동호회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다음날 곧바로 그는 일주일에 걸쳐 부팅 등 컴퓨터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을 배운 뒤 아이 옷 만들기 등을 하는 양재 동호회에 가입하고 활동한다. 1년 동안 모임하면서 중간 과정 등의 내용들을 후기로 올리게 되는데 평판이 좋았다. 재미있다는 반응들이었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1년 후 아예 지금까지 틈틈이 배워왔던 손뜨개를 가르치는 ‘손뜨개방’을 만든다. 
“양재동호회 1년을 마치고 손뜨개방을 만들 때 베스트베이비라는 어린이잡지가 창간이 됐다. 그 당시만 해도 외국의 손뜨개 제품이 실린 서적이 수입된 게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 잡지에서는 궁금하던 외국의 내용들을 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처음으로 전 세계의 니트를 접하게 된 것이다. 그 당시의 문화적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주부동호회에서 만난 기자를 통해 운 좋게도 잡지에다 손뜨개질 연재를 2년 동안 하는 행운도 얻게 됐다. 물론 유럽의 니트에 훅 빠지게 된 시기이기도 했다.”
잡지 연재까지 하게 된 송 대표는 한층 탄력이 붙었다. 그러던 중 PC통신에서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사주 봐주는 통신, 인생 상담해주는 통신 등이 인기가 치솟으면서 월 1천만원씩 버는 스타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들을 유심히 지켜보던 그는 자신도 한 번 뜨개질로 스타에 도전해 봐야겠다는 생각에 이르고 하이텔, 천리안 등 4대 통신사에 제안서를 넣는다. 이들 중 천리안에서 연락이 왔다. 천리안 PC통신에서 전자상거래를 통해 통신판매를 하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었다. 
차츰 TV에 얼굴이 나오기 시작하자 연재하던 잡지사는 잡지사대로 홍보에 열을 올리고 통신사는 가입률을 높이기 위해 언론에 그를 자주 노출시키는 바람에 인터뷰로 하루를 지내는 날이 있을 정도였다. 취미로 시작한 뜨개질이 사업의 가능성을 잉태시키고 있었다. 그는 PC통신에서 서서히 스타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의 남다른 안목과 실행력이 서서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사물의 행간을 읽어내는 탁월한 예지력과 과감하게 실행하는 그의 강단은 훗날 그의 사업 운영의 전반에 걸쳐 투영된다. 

 

▲(주)바늘이야기의 바늘이야기 송영예 대표 ⓒ사진 이현석 팀장

남편 부도로 세상 밖에 나온 가정주부의 변신

하지만 이렇게 PC통신에서 인기가 상승할 즈음 집에는 검은 먹구름이 서서히 몰려오고 있다는 것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조경 사업을 하던 그의 남편회사가 조금씩 기울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1998년도 IMF를 맞아 거액의 부도를 내고 만다. 채권자들의 핏발서린 원성을 피해있던 남편 대신 그가 일선에 나서야만 되는 현실을 맞게 된 것이었다. 지금까지 동호회 회원으로 만나 친분을 맺어왔던 그들을 상대로 영업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가 처음 맞이한 시련이었다. 
6개월간 잠을 못 청하고 뒤척였다. 자신의 껍질을 깨기에는 아직 주부에 불과했다. 하지만 남편의 부도로 주변여건은 악화되어가고 있었다. 그가 누구인가. 한 번 결정하면 매섭게 실행하는 여장부기질을 가진 이 아닌가. 사업가의 길은 그렇게 시작됐다. 때마침 33살이던 1999년은 인터넷의 상륙으로 자율경쟁이 벌어지고 있던 시기였다. PC통신에서는 실을 올리면 수수료를 내야했다. 그는 인터넷으로 전환을 하고 50만원을 들여 엉성하게나마 홈페이지를 만든다. 
PC통신에서 인기를 끈 송 대표는 이미 98년도 하반기에 동아일보사로부터 손뜨개 책을 만들자는 제안을 받은 상태였고 1년의 작업을 거쳐 마침내 99년도 하반기에 책이 나오게 된다. 제목이 <송영예의 너무 쉽고 예쁜손뜨개>였다. 센세이션이었다. 이 책은 5년에 걸쳐 25만부라는 경이로운 판매기록을 만들어내고 송 대표를 일약 손뜨개업계의 스타로 만들어준다. 이후에도 동아일보사와는 서로의 신뢰를 바탕으로 10권의 책을 더 낸다. 송 대표가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단어가 신뢰다. 10권 모두 5만부 내외가 팔린 전문서적 베스트셀러들이다.
“경제활동하면서 뜨개를 하던 사람들 모두 이 책을 샀다고 보면 된다. 손뜨개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모르는 이들이 없을 정도로 큰 바람을 몰고 왔다. 그렇게 되자 일본에서 손뜨개를 배워 작품 활동을 해 온 사람들한테서 난리가 났다. 갑자기 나타난 쟤가 누구이기에 이렇게 야단이냐. 책 같지도 않은 책을 냈다고 비아냥되기도 했다. 오히려 동아일보에 전화를 걸어 자기네가 더 멋있고 화려한 책을 내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런데 사양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작품집이 아니고 일반인들의 눈높이에 맞춰 실용서적을 만드는 게 동아일보의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1인 기업으로 출발, 2년 동안 4시간도 못 자
2년 동안은 너무 바빠서 하루에 4시간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직원 없이 혼자 시작한 1인 기업이다 보니 서적을 만들고 인터넷 문의가 올 때 제때 답을 해주기 위해서는 잠을 줄이는 것 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가입비 3만원에다 인터넷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자신을 믿고 돈을 주고 실을 사는 것인데 댓글이나 서비스는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을 사기 위해 인터넷에 문의 글이 올라오면 그는 바로 댓글을 다는 걸 원칙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엄청난 중압감이었다. 
하지만 이 원칙은 훗날 송 대표를 믿을 수 있는 CEO로 자리매김하고 신뢰의 기업인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만드는 일등공신이 된다. 그 당시만 해도 잡지연재와 연결된 사람들이 실을 사달라고 하면 재미가 한창 들었던 시기라 마진을 안 붙이고 부쳐주곤 했다. 그런데 99년도에 출간한 책이 대박이 나면서 그의 인터넷사업은 불이 붙기 시작한다. 주부에서 1인 기업으로 시작한 지 1년 만에 실 판매로 월 4백만원 내외의 수입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독자들이 사이트에 들어와서 실을 구매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일들이 빈번해질 당시 바늘이야기 브랜드를 사용하고 싶다는 의견도 종종 올라오곤 했다. 첫 번째 가맹점은 강원도 정선에서 이뤄졌다. 
실을 구매하던 고객인데 브랜드가 너무 예뻐서 사용하고 싶다고 해 허락하게 된 것이다. 너무 고맙다며 동네에다 플랜카드도 걸고 지역신문에다 기사도 싣고 해 유명해진 케이스다. 이어 송 대표는 앞으로 있을 가맹점과의 관계설정을 명확히 하기위해 계약서를 만들고 2000년 10월부터 본격적으로 가맹사업을 펼치게 된다. 거칠 것이 없었다. 자고나면 가맹점 계약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달은 하루에 30~40개의 계약을 치룬 적이 있을 정도로 인기 절정이었다. 

대박 난 책과 성실함 덕분에 가맹점 문의 전화 빗발쳐
남편들의 사업체 부도와 명예퇴직이 횡행하던 시절인데다 주부들의 기술창업 아이템으로 제격이라는 언론들의 연이은 소개가 한몫했다. 그리고 유럽 실도 2001년부터 본격적으로 수입해 오기 시작한다. 유럽에서 단추를 수입해 판매하는 지인들에게 조금씩 실을 부탁해 왔던 그는 직접 3월에 열리는 독일의 박람회에 참석, 유럽의 유명브랜드와 계약을 맺는데 공을 들인다. 일본과 우리나라는 비교적 울이나 면 등 자연섬유를 좋아하는 편이다. 하지만 유럽은 아크릴과 나일론을 많이 쓴다. 견고하면서도 상당히 가벼운 게 특징이다. 바늘이야기의 가맹점들이 5년 만에 220여개로 확대되자 기존 재래시장의 실 판매상인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다. 
개인이 운영하던 가게들이 모두 바늘이야기로 바뀌는 게 아니냐는 우려였다. 생존의 터전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짙게 깔려 있었다. 송 대표는 독자노선으로 맞섰다. 동아일보에서 계속 발간된 손뜨개 서적이 인기리에 팔리고 있고 거기서 파생되는 단골고객들이 인터넷으로 중간 마진 없이 싸게 구입해가는 유통구조를 자신했고 믿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동대문 등 재래시장 상인들이 제조업체들을 찾아가 단체로 데모를 하고 송 대표와 자신들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수준까지 가는 반발이 이어졌다. 
실 유통업계에서 여성은 혼자였다. 버거운 싸움이었다. 그러자 제조업체들이 중재안을 내놓게 된다. 바늘이야기에만 라벨을 따로 감아서 제공하겠다는 것이었다. 일종의 OEM방식이었다.
“가맹점이 급격하게 늘어나니까 재래시장 상인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다. 아마 가맹점이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한 2003년부터인 것으로 기억한다. 바늘이야기는 인터넷에 가격을 다 공개를 했다. 일례로 제주도에서는 똑같은 실인데도 불구하고  20%가 더 비싸다. 항공료가 포함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늘이야기는 전역에서 같은 가격으로 판매했다. 경쟁이 될 수가 없는 구조로 가니까 재래상인들의 불안이 증폭된 사건이다. 결국 어정쩡하게 OEM방식으로 처리가 됐지만 가맹점은 2005년까지 여세를 몰아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송 대표는 재래시장 상인들과의 마찰이 현실화되자 뛰어난 그 특유의 안목을 발휘한다. 그리고 그의 특허인 빠른 실행력으로 사업의 구상을 다시 재단한다. 유럽 실들을 더 적극적으로 수입하면서 무역업에도 뛰어드는 방안을 모색한 것이다. 한때 13개 나라의 유명 브랜드와 계약을 성사시켜 주목을 받기도 했다. 현재는 영국, 프랑스, 미국, 이태리, 일본 등 나라의 6개 브랜드와 독점계약을 맺고 있다. 

재래시장 상인들과의 담판 승부,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 모험적 시도는 뒷날 그가 손뜨개 분야에서 중고가 실 종류만 판매하면서도 롱런하게 되는 디딤돌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급격히 증가한 가맹점들로 인해 부작용이 노출되기 시작한다. 실 유통업계의 고질적인 ‘외상’이 그의 경영을 위협했다. 한 해 매출액이 22억원을 넘어설 무렵인 2005년 당시 외상이 8억원에 달했다. 실을 먼저 납품하고 팔리면 결제를 해주는 유통구조의 악순환에서 비롯됐다. 그는 여태껏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던 유통구조에 메스를 가하기로 마음먹고 선금 결재를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물건을 내주지 않았다. 이 엄청난 사건은 금세 업계에 쫙 퍼졌다. 
재래시장 상인들은 그러나 이 소식을 듣고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못마땅한데 잘 됐다 싶었다. 외상을 주겠다며 가맹점들을 파고들었다. 복수거래로 양다리를 걸치는 가맹점들이 늘어났다. 송 대표도 물러서지 않았다. 한 번 결심하면 해결해야 하는 승부사기질도 작용했다.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복수거래를 하는 업체들에 최후통첩을 했다. 그리고 정리하기 시작한다. 220개에 달했던 가맹점은 2년에 걸친 정리로 2007년도에 이르자 70개로 줄었다. 어려운 결심이자 힘든 시절이었다. 그러나 위기였던 이 2년에 걸친 대장정은 그에게 뜻하지 않게 기회로 반전돼 다가온다. 
바늘이야기에서 유럽 실을 샀던 고객들이 가맹점들이 없어지자 갈 곳을 잃은 것이었다. 자연히 본사에서 운영하는 인터넷으로 들어와 유럽 실을 구매하기 시작했다. 가맹점을 거치지 않은 탓에 본사에서는 매출이 더 늘어나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가맹점이 줄었는데 매출이 느는 예상외의 상황에 모두들 놀랐다. 본사가 가맹점에 주는 마진을 없애고 직접 소매를 한 덕분이었다. 이 과정을 다시 시스템으로 연결시키는데 2년여의 시간을 들였다. 본사가 220여개의 가맹점이 있었던 때보다도 훨씬 건강한 조직으로 재탄생되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 것이었다. 

예지력이 넘치는 안목과 과감한 실행력이 최대 장점
송 대표의 과감한 결단과 유럽 실의 가치를 일찍 꿰뚫어 보는 안목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현재 적게 보이는 50여개의 가맹점을 가지고도 안정적인 매출을 기록하는 것도 이 당시 덕분이다. 그는 이 사건을 겪은 후 가맹점을 쉽게 내주지 않는다. 교육을 2년 정도 받아야 비로소 자격을 얻는다. 개인 샵을 가지고 있는 가맹희망자라도 6개월의 핵심적인 교육을 배워야만 한다. 초보자의 경우 5년의 교육을 이수하여야만 가능할 정도로 엄격하다. 특히 가맹점의 경우 1년에 5회 실시되는 교육에 반드시 참석해야 되고 그 중 1회는 1박2일로 진행되는 워크숍이다. 
현재 운영되고 있는 가맹점들은 바늘이야기의 플랫폼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50명의 점주들이 가게에서 물건을 파는 영업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뜨개질로 뜬 상품을 올려 보내면 지적재산권을 인정해 본사에서 팔아주고 대신 로얄티 25%를 지불해주는 등 본사와 가맹점간 윈-윈 시스템도 2009년부터 가동해 오고 있다. 바늘이야기에서 취급하는 품목만 현재 3000여 가지가 넘고 매출은 쇼핑몰(소매)이 70%, 가맹점(도매)이 30%를 차지한다.
“지금의 안정적인 경영시스템을 가지게 된 건 순전히 2005년부터 시작된 부실 가맹점 정리덕분이다. 업계에서 철벽처럼 관행으로 굳어진 외상거래와 복수거래를 각오하고 해결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아마 그들에게 끌려 다니지 않았을까 싶다. 어려운 결정이었고 결국엔 해결해 지금의 모습으로 환골탈태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 이후 지금까지 어려움 없이 회사가 잘 돌아가고 있다.”
바늘이야기에서 운영하고 있는 ‘아카데미’ 교육기관과 산자부에서 인정받은 손뜨개협회도 송 대표의 애정이 진하게 묻어나는 곳이다. 작년까지 모두 3000명의 수강생을 배출한 이 명문 바늘이야기 아카데미는 손뜨개 인구를 확장시키는데 절대적이라고 불릴 만큼 규모와 역사를 자랑하는 기관이다. 다양한 교육 커리큘럼으로 실력양성에 더할 나위 없이 유익하며 수업이 끝날 때마다 전시회를 열어 수강생들의 자부심도 고취시켜준다. 2008년에 송 대표가 직접 발족시킨 손뜨개협회도 이 분야의 발전에 적지 않게 기여해 오고 있다. 지금까지 협회가 배출한 500명 이상의 강사들은 현장에서 손뜨개 인구의 매력을 알리며 질적 수준과 저변을 확대하는데 큰 역할을 해왔다. 

고용보험 환급과정 적용에 최선 그리고 박물관 거립이 목표
작년에 마련한 파주의 신사옥도 송 대표의 자부심이다. ‘바람뜰’이라는 이름을 단 이곳은 ‘바늘이야기에 사람들이 모여 함께 뜨개하는 공간=뜰’이라는 의미와 ‘바람이 머물다가는 뜰’이 함의돼 있다. 이곳은 쇼핑몰에서 운영하는 도서와 뜨개질 관련 모든 상품을 판매하는 공간이며 직접 방문해서 구매한 고객에게는 10~20%의 가격할인 혜택도 준다. 2층 카페에서는 함께 모여 차를 마시고 뜨개질하는 장소로 누구나 이용할 수 있고 모임, 강습, 전시를 위한 무대로도 사용이 가능하다.
송 대표의 긍극적 목표는 무엇일까. 
“일차적인 것은 협회에서 추진하고 있는 교육생들의 고용보험 환급과정 적용 문제이다. 정부에서 지원하고 있는 이 고용보험 환급과정에 손뜨개강의가 빠져 있어 혜택을 못 받고 있다. 손뜨개 인구의 지반을 넓히기 위해선 이 환급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년에도 정부 측에 또 한 번 요청할 계획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손뜨개 박물관을 건립하는 것이다. 원료의 생산 과정부터 제품 제작까지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기록관을 세워 손뜨개 산업의교육과 발전에 활용될 수 있도록 하고 싶다. 아마 60살 이전에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까지 17년 동안 사업을 펼치며 보여준 송 대표의 안목과 과감한 실행력이라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닌 듯싶다. 더구나 ‘신뢰’를 삶의 한 가운데 놓고 사는 송 대표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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