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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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핏
  • 지유리 기자
  • 승인 2023.03.2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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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부림양복점> 박수양 대표

박수양 대표는 매일 고객의 치수를 재고 옷을 만드는 일이 그저 행복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객에게 감동을 주는 재단사로 오랫동안 남고 싶은 것이 꿈이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무엇보다 이웃을 뜨겁게 사랑하는 그는 마음 따뜻한 명장이다.  

엘부림양복점  박수양 대표 ⓒ 사진 이현석 팀장
엘부림양복점 박수양 대표 ⓒ 사진 이현석 팀장

 


<엘부림양복점> 입구에는 여럿 간판이 걸려있다. 그중 ‘엘부림테일러숍 Since 1975’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노포가 흔치 않은 서울 한복판에서 40여 년의 세월이 묻어있는 곳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반가움이 앞섰다. 결코 녹록지 않았을 박수양 명장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홀로 인생을 개척하다
박수양 대표는 <엘부림양복점>을 변방에 위치한 곳이라고 설명했다. 그럴 것이 양복점 하면 흔히 멋쟁이들이 거리를 활보하던 명동이나 종로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박 대표가 답십리에 뿌리를 내린 것은 그의 외삼촌의 영향이었다.

경기도 포천이 고향이던 박 대표는 중학교를 졸업한 후 무작정 서울로 상경해 외삼촌이 거주하던 답십리에 오게 됐다. 1960년대 후반, 답십리를 기준으로 장안동, 전농동 일대에는 양복점이 꽤 많았다. 그렇게 박 대표는 양복점에 취업해 재단사의 일을 배울 수 있었다.

당시만 해도 기술을 전수하던 시절이 아니었기에 그는 어깨너머 일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 박 대표는 낮에는 잔심부름으로, 밤에는 그날 배운 기술을 익히며 차곡차곡 자신의 실력을 쌓아갔다. 그는 성실함과 손재주로 점차 인정받기 시작했고, 제대 후 본격적인 양복점을 개점하게 됐다.

1976년, ‘부자富’, ‘수풀林’의 뜻을 담은 ‘부림양복점’의 대표가 된 그는 이후 여럿 기능경기대회를 통해 실력을 인정받았고, 한국맞춤양복기술협회 부회장, 2005년에는 독일 세계총회 한국 대표 심사위원을 지내면서 명장의 반열에 오르게 됐다.

“한때 우리나라는 세계 기능올림픽에서 12연패를 달성할 정도로 재단 기술이 최고였어요. 하지만 기성복에 밀려 양복점이 점차 사라지는 현실이 안타까워요. 현재 동대문구 일대에는 우리 집만 남고 다 폐점한 상황입니다.” 

 

엘부림양복점  박수양 대표 ⓒ 사진 이현석 팀장
엘부림양복점 박수양 대표 ⓒ 사진 이현석 팀장

트렌드를 읽다
<엘부림양복점> 역시 새로운 변화를 맞이했다. 영어 교사를 꿈꾸던 둘째 아들 승필 씨가 가업을 잇겠다고 선언한 이유다. 박 대표는 유럽에서 열린 남성복 패션쇼에 승필 씨를 동행했고, 외국의 명품 브랜드를 본 승필 씨는 아버지의 기술로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고, 자신이 도움이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후 승필 씨는 본격적인 리뉴얼 작업을 했고, 그 첫 번째 작업이 상호의 변경이었다. 기존의 ‘부림양복점’에서 하나님의 히브리어인 ‘엘로힘’의 ‘엘’을 더해 지금의 <엘부림양복점>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맞춤 양복의 대중화를 위해 몸의 굴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에스라인 패턴을 개발했다.

이로인해 좀 더 고객의 핏에 맞는 제품을 만들 수 있었고, 한 번의 가봉으로도 제작이 가능해졌다. 박 대표는 고객의 몸에 잘 맞고 핏을 살릴 수 있는 옷이야말로 가장 잘 만든 옷이라고 설명했다. 평면의 재단을 바탕으로 소매와 가슴에 볼륨을 넣어 입체감을 살리는 작업은 정교함과 정확함이 필수다.

박 대표가 항상 목에 걸고 있는 줄자와 초크는 그의 분신과도 같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눈과 손이야말로 자로 재듯 정확한 수치를 재는 도구다. 변화를 가져온 <엘부림양복점>의 주 고객층은 2030 젊은 층이다. 하지만 박 대표를 먼저 러브콜한 곳은 방송계였다. 특히 박 대표는 최근 ‘정동원 양복점’으로 불릴 만큼 미스터트롯 정동원 군과 특별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미스터트롯 결승전 방송 때 정동원 군이 입은 양복이 바로 박 대표가 제작한 양복이다. “정동원 군 부모님의 초청으로 하동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극진한 대우를 받았어요. 정동원 군 팬들에 둘러 쌓여서 사진 촬영을 하는데 마치 제가 연예인이 된 기분이었죠.” 


사랑을 되갚다
올해 73세가 된 박 대표는 70세가 되던 해 농어촌 목회자와 선교사 70명에게 맞춤 정장을 선물했다. 자신의 칠순을 기념하면서 달란트 나눔을 실천한 것이다. 예전부터 꾸준히 어려운 목회자를 위한 기부를 실천했던 박 대표는 자신이 받은 사랑을 세상에 되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앞으로도 어려운 이웃을 돕는 기부활동에 매진할 계획이다. 박 대표는 양복을 만들 때 기술이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고객과의 믿음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자신을 믿고 찾아온 고객에게 만족스러운 옷을 제작하는 것은 자신의 당연한 몫이자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옷을 통해 고객을 감동시킬 수 있다면 자신은 너무 행복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세상에 단 한 벌뿐인 옷을 만드는 일.

박 대표는 자신의 달란트로 감사한 삶을 살았다며 앞으로의 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가업을 이어가는 아들을 응원하면서 저 역시 건강이 허락하는 한 현장에서 여전히 고객의 옷을 만드는 재단사로 살고 싶어요. 그 일이 제게는 행복이고, 삶입니다.” 고객 몸의 치수를 재고, 패턴을 뜨고, 양복을 재단하는 일. 한땀 한땀 정성을 다해 옷을 만드는 과정은 박 대표에게 매일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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