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_ 새로운 트렌드의 선봉에 서다 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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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_ 새로운 트렌드의 선봉에 서다 ➃
  • 이인규 기자
  • 승인 2014.07.29 07:15
  • 조회수 178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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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맥 열풍의 주인공 <깐풍기브라더스>
▲ (주)브라더스 컴퍼니 직원들 ⓒ 사진 박세웅 기자

맛있다. 깐풍기의 불맛과 바삭한 튀김이 어색하지 않게 느껴진다. <깐풍기브라더스>가 인심좋은 브랜드로 소문이 났지만 맛없는 메뉴를 양으로 승부한 것은 아니다. 서울이 어디 맛없으면 성공할 수 있는 상권인가? 다른 얕은 수에 잠깐 손님이 몰려도, 맛에 대한 철저한 판단은 단숨에 날겨들을 골라내지 않던가? 그런 서울 상권의 날카로움을 톡톡히 겪어내며, 한단계 성장하고 있는 브랜드가 있다. 바로 <깐풍기브라더스>다. 지방에서 나름의 성공대로를 걷다가 시장상황이 전혀 다른 서울에 큰맘먹고 둥지를 튼 김대희 대표는 최근 서울에서 성장통을 겪으며 더 큰 폭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남들보다 빠른 보폭이 약이 되다
나고 자란 곳이 충청도인 김대희 대표. 어렸을 적 아버지의 사업과 어머니의 대형 식당 운영으로 남부럽지 않은 부유한 생활을 했던 그는 16살 때 완전히 망하는 경험을 한다. 아버지의 사업이 의도치 않은 보증 실패로 무너진 것이다. 단숨에 파출부로 남의 집 살림을 하시게 된 어머니, 안하던 운전으로 어깨에 파스가 떨어질 날 없던 택시 운전수 아버지. 김 대표는 갑작스런 생활의 변화에 어쩔 줄 몰라했다. 사춘기 때라 방황에 대한 깊은 고민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다 17세 때 어머니가 새벽같이 출근하시는 뒷모습을 보고 철이 들기 시작한다. 남들보다 빠르게 알게된 현실의 아픔이었다.

그래서 무작정 아르바이트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어느 가게에서 17살짜리 애한테 일을 맡기겠나. 퇴짜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메가폴리스’라는 의류전문 쇼핑몰 내에서 만난 동대문 알짜배기 여사장 눈에 든 그는 그곳에서 고등학생 시절 2년 동안 장사의 모든 것을 배우고 그의 적극적인 성격이 더해져 주변에 스카우트 1순위로 올라서게 된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얻게된 16.5㎡(5평) 가게에서 옷을 팔기 시작했다. 월 200~300만 원의 수입이 있었지만 집에 있는 빚을 갚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시작한 나이트클럽 웨이터 생활은 군대 가기 전까지 계속됐다. 밤마다 어머니 머리맡에 두고 나온 현금이 꽤 됐었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었다. 그리고 군 전역 후 그동안 부모님이 하던 조그만 식당을 다시 리뉴얼해 외식사업에 참여하게 된다.

▲ <깐풍기 브라더스>의 첫 번째 서울진출 홍대점 ⓒ 사진 박세웅 사진기자

실패의 연속, 전진을 위한 긴 후퇴
그렇게 시작한 외식업이 그의 특출난 영업 능력과 아이템 선정이 합해져 빛을 보기 시작했다. 청주에서 유명한 칼국수집으로 소문이 나면서 조금씩 생활이 나아진 것이다. 하지만 소문듣고 찾아온 빚쟁이들 때문에 제대로 영업도 못하고 빚도 많이 못갚게 됐다. 그렇게 빚정리에 들어간 돈 때문에 26살 되던 해에 다시 빈손이 됐다. 그리고 그는 재기에 대한 열망으로 아무도 모르는 부산에서 다시 청주로 그리고 전주까지 이어졌다. 부산에서의 3000만 원은 전주에 내려갈 때쯤에는 2700만원이 됐다.

그리고 그는 함께 일해 왔던 친구와 호프집에서 같이 일했던 매니저, 그리고 자신까지 셋이서 장사를 하기 위해 의기투합한다. 새로운 아이템 찾기에 고심하던 그들은 우연히 저녁식사를 하러 들어간 중식당에서 깐풍기를 맛보고 단숨에 아이템을 정하게 됐다. 당시만 해도 고급 중식요리에 들던 깐풍기는 대중화만 시킨다면 사업 성공이 있어 보였다. 그래서 그는 대학교 상권에 눈을 돌렸다. 전북대학교 골목 16.5㎡(15평)짜리 점포에서 시작한 ‘김대희 북경깐풍기’ 1호점이 문을 연 것이다.

▲ <깐풍기 브라더스> 김대희 대표 ⓒ 사진 (주)브라더스 컴퍼니 제공

그러나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는 법. 장사가 안되 전전긍긍하던 초반 그는 그의 영업마인드로 초강수를 두기 시작한다. 학생이라는 점을 감안한 서비스였는데, 남은 음식은 무조건 먼저 포장, 음료수 무료, 생일 손님에게 미역국까지. 그리고 끼니를 걸렀다고 하면 라면도 먼저 턱턱내놨다. 학생들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결국 7개월 만에 월 매출 3500만 원을 찍게 된다. 그렇게 메뉴도 늘리고 손님들로 매장을 가득 매워간다는 소식이 고향격인 청주에 전해지자 지인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초창기 파리 날리던 가게에서 줄을 서서 먹는 집으로 변하게 됐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으리라. “그러던 중 한분이 청주에 2호점 격으로 하나 점포를 내달라고 하셨어요. 그전과는 상황이 180도로 바뀐거죠.” 그래서 그는 충북대학교 앞에 2호점을 개설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곧이어, 충북대 점포를 인수하고, 청주대 앞에 3호점까지 직영점 형태로 운영하게 된다.

서울에서의 호된 신고식은 똘똘 뭉친 의리로 돌파

▲ <깐풍기 브라더스>의 다양한 깐풍기 메뉴 ⓒ 사진 박세웅 기자

서울에서도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러나 서울에서의 가맹사업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아직 검증된 것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그는 직접 검증하기로 한다. 기존에 있던 직영 3호점까지 모든 점포를 넘기고, 자본금을 모아 주변에 모인 진짜 형제같은 팀원들과 서울로 올라왔다. 매장 자리와 숙소를 잡고, 사무실 계약까지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자본금이었다. 하지만 서울 핵심상권의 임대료는 그의 상상 너머에 있었다. 그래도 홍대에서 시작해야 전국 브랜드로서의 입지가 설 것이라 생각한 그는 본사 사무실과 매장을 홍대 상권에 잡게 된다.

“처음엔 서울이 이런 곳인지 몰랐습니다. 각박하다고 할까요? 첫 오픈 당시에 인사차 주변 가게를 들렸을 때도 차가운 반응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진짜 총성 없는 전쟁터 같았습니다.” 이런 호된 홍역을 치른 그는 힘들 때마다 곁에 있어준 지금의 ‘브라더스’에 의지했다. 하나로 뭉친 그들은 곧 높은 서비스와 맛, 그리고 고객을 잡는 시스템을 구축했고, 프랜차이즈에 맞게 물류 시스템도 완성시켰다.

“특히 서울에서 어떤 상술도 아닌 정공법으로 성공하고자 합니다. 방송을 타거나 눈속임이 아닌 맛과 시스템으로 고객을 잡아야죠.” 그의 정면 돌파에 대한 의지가 엿보인다. 기획적인 마케팅으로 한순간 흘러가는 브랜드가 아닌 내실을 튼튼히 하기 위해 지금은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다고 비유한다. “결국 살아남는 게 목표입니다. 지금 해외진출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데, 저희는 좀 더 강한 본사를 먼저 구축하려 합니다. 섣불리 도전해서 지금까지의 공든 탑을 무너뜨리지 않을 겁니다.” 그의 성공에 대한 강한 의지는 반드시 그렇게 하리라고 느껴지게 한다.

Tip_ <깐풍기브라더스>의 전국 평정 키워드
·기획적인 경영이 아닌 정공법으로 돌파
- 얕은 술수로 맛집이라고 소문내지 않고 고객의 검증이 자연스럽게 이뤄지도록 인내
- 사장이라는 마인드를 버리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접근
·정통 깐풍기는 아니지만 대중화를 위한 메뉴 개발은 필수
- 기존 아이템에 작은 변화를 줘 대중화하기
- 레드오션이라도 수요가 있는 한 색다른 방법으로 성공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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