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ㆍ가격ㆍ양 3박자를 모두 잡은 명품 순댓국 프랜차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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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ㆍ가격ㆍ양 3박자를 모두 잡은 명품 순댓국 프랜차이즈
  • 창업&프랜차이즈
  • 승인 2015.09.16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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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강엔터프라이즈의 <큰맘할매순대국> 권익현 대표
▲ 캐리커쳐 원소정 작가 ⓒ사진 주현희 기자

“배운 건 버릴 게 없는 것 같다” 다양한 실패에서 인생의 행간을 읽어내다
순댓국 프랜차이즈 전문 브랜드인 <큰맘할매순대국>을 운영하는 (주)보강엔터프라이즈의 권익현 대표의 양쪽 입가에는 큰 주름이 하나씩 새

겨져 있다. 편안하고 다정한 미소를 자주 지은 덕에 생긴 훈장이다. 그만큼 그는 삶의 언저리가 긍정적이고 낙천적이다. 직장을 나와 홀로 독립해 사업으로 좌절할 때마다 그를 건져 올린 건 지치지 않는 열정과 긍정이었다. 언젠가는 이루어 낼 것이라는 자신만의 확신으로 실패하고 어려움에 처할 때 스스로를 다독여 왔다. 그가 맛과 가격과 양을 모두 만족시키는 시스템을 완성하고 프랜차이즈 업계를 발칵 뒤집어 놓고 있다. 브랜드를 론칭한 지 26개월 만에 가맹점 400여 개를 개설해 풍운의 기업가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본사의 마진을 최소화하고 가맹점주들의 이익을 최대화시키는 시나리오를 현실화시키는 이는 드물다. 욕심 때문이다. 그는 이 어려운 난제를 버림과 비움과 나눔으로 승화시키면서 해결해 냈다. 가맹점이 계속 늘어날 때마다 물류의 공급가액을 지속적으로 낮추고 홍보도 본사가 다 책임지고 비용을 들인다. 가맹점주 한 사람이 가맹점을 2개부터 7개까지 하는 이유다. 그만큼 본사를 신뢰하고 따른 결과들이다. 그가 이제 해외를 두드리고 있다. 명품 순댓국의 광풍은 중국에서도 대륙의 바람을 일으킬 것인가. 궁금하다.


첫 점포 오픈 후, 26개월 만에 400개 가맹점 ‘화제’
오랜 불황에 자영업자들의 신음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1997년 말경에 터진 IMF시절보다 더 어렵다는 소리마저 들리는 요즘이다. 건물 하나 건너에 걸려있는 사무실 임대 홍보 현수막이 마치 이를 웅변하듯 한다. 무엇을 해도 되는 게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늘어만 가고 있는 시절이다. 대한민국의 생명줄인 수출마저 둔화되고 있어 앞날을 가늠하기가 결코 쉽지가 않다. 경제가 시름시름 앓아가고 있는 것이다. 대졸 실업자가 150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기업들도 구조조정의 칼날을 매만지고 있는 중이다. 현상유지만 해도 잘하고 있다는 평을 듣는 게 현실이다.
브랜드를 런칭하고 직영점을 오픈한 지 26개월 만에 가맹점을 무려 400여 개 오픈한 프랜차이즈다. 보통 7000원 내외의 순댓국을 착한 가격대인 5000원에 판매하면서도 맛과 양에 있어서 그 어떤 가게보다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는 시스템이다. 보통 맛과 가격만 잡아도 대박집의 명성을 얻는데 이곳은 여기에다 양까지 푸짐하니 인기상한가다. 평소 손님이 없는 가게이거나 심지어 폐점한 점포에 새로 입점하기만 하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고객들이 미어져 들어오는 통에 오히려 종업원들이 달아날 정도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브랜드다. 입소문으로 점주들이 2개 이상씩 운영하는 가게로 명성을 얻고 있을 정도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다. 거래하는 협력업체만 100여 개에 이른다. 이 회사의 대표 역시 7번의 실패 끝에 8번 만에 재기 하는데 성공해 화제다.
마치 불황을 비웃기라도 하듯 무섭게 가맹점을 개설해 나가고 있는 순댓국 프랜차이즈 전문브랜드<큰맘할매순대국>을 운영하는 (주)보강엔터프라이즈의 권익현 대표(55)는 지난 26개월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다. 지난 2년 동안 순댓국 판매량은 말할 것 없고 소주 소비량과 머리고기 사용량이 국내 1위라는 놀라운 기록마저 세울 정도로 이 분야에서는 파죽지세다. 그는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일까. 26개월 만에 400여 개의 가맹점을 오픈했다면 한 달에 거의 15~16개의 가맹점 개업 공사를 했다는 설명이 아닌가. 실로 놀라운 내용이다.

어렸을 적 외지로 잦은 전학,적응력과 생존력 몸에 배
그것도 최악의 경제국면이라는 요즘에 이뤄낸 실적이니 더욱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요즘 가맹본사에서 한 달에 가맹점 1~2개만 개설해도 수고했다며 서로 위로를 해주는 분위기다. 그렇다면 <큰맘할매순대국>은 무엇으로 하여금 이토록 고객들을 열광케 한단 말인가. 그리고 권 대표는 도대체 어떤 비결로 가격과 맛과 양 등 3박자를 모두 잡을 수 있었단 말인가.
지금 프랜차이즈 분야에서 가장 핫한 브랜드로 떠오르고 있는 <큰맘할매순대국>의 사령탑인 권 대표의 경영술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그의 본사 사무실이 있는 천호동 암사시장 어귀에서 조우했다.
그의 오늘의 터전이 있게 한 지역이다.
편안하고 부드러운 만면에서 빚어내는 흡입력이 상당하다. 호남형의 얼굴에서 환한 미소가 번질 때면 언제 처음 만났냐는 양 금세 이웃으로 동화시키는 무언의 기운이 일품이다. 대화 기법도 구불구불하지 않고 쭉 내달린다. 이리저리 재지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온 이들의 이력이리라. 쉼 없는 대화거리와 다양한 표현력은 그의 푸근한 외모와 더불어 주위에 사람이 많이 모이게 하는 동인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오늘을 만든 또 하나의 힘인 강한 긍정과 추진력은 모두 그의 눈빛에서 일어선다. 간간히 그리고 언뜻 언뜻 길어 나르는 눈빛 조도의 강렬함이 그 증좌다. 그렇게 그는 2015년 후반기를 걸어 나오고 있었다.
권 대표는 경북 안동이 고향이었던 부친이 철도공무원이었던 관계로 초등학교만 지방으로 전학을 무려 6번이나 다니고 중학교, 고등학교도 각기 다른 지방에서 나왔다. 아버지의 전근이 확정되면 여지없이 학교를 옮겨야 했던 그는 아마도 이 시절부터 순응력과 적응력 그리고 생존력을 조금씩 그의 온몸에 쌓아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가 사회에 나와 사업을 할 당시 여러 번의 실패에도 불구, 툴툴 털고 일어나 또 다른 분야에 도전하고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는 등 지칠줄 모르는 치열함을 보여주는 힘의 원천이 이 시절 체득된 것인지 모를 정도로 여러 지방을 다니고, 거기서 또 적응하고 새로운 환경들을 내 것으로 만들었어야 했으니 말이다.
화학회사에서 따낸 이공계 각종 자격증 훗날 재산 돼
권 대표는 대학서 배운 전자공학과는 다르게 졸업 후 섬유공장에 들어간다. 주로 스키복 제조와 의류를 수입해 판매하는 회사였다. 전공하고 달라 어려움이 있었지만 국내에 스키장이 5개밖에 없을 당시여서 회사입장에서는 한창 사세를 확장하려 할 때였다. 그는 이곳에서 특유의 친근함과 부지런함으로 영업에 두각을 나타내고 나름대로 회사 성장에 큰 기여를 한다. 그러나 영업을 하면서 잦은 술과 음주운전에 내몰렸던 그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그의 미래에 대한 불안도 존재했다.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3년만에 첫 직장을 그만두고 그의 전공을 살릴 수 있는 화학회사에서 전기와 관련된 일을 맡아 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그는 그동안 등한시해 왔던 자격증 획득과 관련된 공부를 야간에 집중적으로 하기 시작한다. 뒤늦게 배운 도둑질이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는 이곳에서 전기와 안전 등 업무와 관련된 자격증을 무려 20여 개를 따낸다. 이공계에서 획득할 수 있는 건 거의 딴 상태였다. 폭풍공부였다. 그리고 이 자격증은 훗날 그가 다시 회사를 옮길 때 그의 몸값과 가치를 한 단계 격상하는데 절대적으로 작용한다.“학교 다닐 때 사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고 노느라고 자격증 따는데 소홀했다. 그런데 첫 직장에서 회사를 옮긴 곳이 야간에는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다시 공부해 관련된 자격증들을 따는데 신경을 많이 썼다. 이 당시 했던 시험공부만큼 열심히 한 적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00관리공단에서 기술직 직원을 뽑는다는 광고를 보게 되고 시험에 응시해 합격하게 된다. 그의 인생 2막이 이곳에서 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는 이곳에서 만능인으로 불렸을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 이전의 회사에서 획득한 자격증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전기,산업안전, 가스 등 다양한 자격증으로 휴게소 곳곳에 그의 손길이 안 닿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얼마가지 않아 직종도 기술직에서 사무직으로 발령을 받는다.
그를 눈여겨 보아오던 임원이 능력을 인정해 직종을 변경시켜 준 것이었다. 그는 휴게소 업무와 관련된 일들에 더 매진하기에 이른다. 드디어 많은 직원들이 갈망하는 직장의 꽃인 휴게소장 자리에 남들보다 2~3배 빠르게 승진을 하는 행운을 맞이하게 된다. 입사 5년만이었다. 보통 20년 가까이 걸리는 자리였다. 그러면서 권 대표의 능력은 일취월장한다. 그는 1인 4~5역하는 기술과 능력을 발휘함으로서 새로 신설되는 오픈 휴게소를 도맡아 맡는 단골소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공단 입사해 빠른 승진…신규 오픈 휴게소만 8개
혼자서 4~5사람의 일을 거뜬히 처리해 공단 입장에서는 비용을 줄이는데 크게 일조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가 만들어 낸 신규 오픈 휴게소만도 무려 8개에 이를 정도였다. 일단 휴게소 기초 골조만 세워지면 그가 투입돼 인테리어, 직원모집, 상품 콘택, 여직원 숙소 마련 등 그의 손이 안 닿는 것이 없을 정도로 그의 능력은 독보적이었다. 그는 전국을 무대로 움직였다. 인맥도 갈수록 넓어져가고 있었다. 지방 곳곳에 지인들로 넘쳐났다. 그러나 이 같은 달콤한 인생 2막은 정권이 바뀌면서 함께 추락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정권이 바뀌면서 민영화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00관리공단도 비껴갈 수 없었다. 민영화로 바뀐 사장이 내려오면서 구조조정이 시작되고 10년이 넘게 휴게소장 자리를 맡고 있던 그도 타깃이 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자격증이 많아서 동료들보다 연봉이 높게 책정된 것이 지적사항으로 떠올랐다. 이미 윗선에서 마음을 정했다는 설이 돌았다. 그는 47세 되던 해 10월 명퇴를 결심한다. 공단 1호 명예 퇴직자였다. 공단에서는 그의 공로를 인정해 1계급특진과 함께 D광장 커피코너 운영권을 증여했다. “평생 천직으로 여기고 60세까지 공단에서 일할 줄 알았는데 쉽지 않았다.20년 가까이 일한 곳이었다. 그냥 근무한 곳 빼고 직접 오픈한 휴게소만도 8개에 이를 정도로 온 몸을 다 바친 곳이었다. 나와서 보니 집을 합쳐 전 재산이 3억 원 정도 밖에 안 되더라. 47살의 나이에 사회에 나가서 무엇을 해야 하나 생각하니 앞이 막막했다. 그런데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니 대부분 창업을 하는데 그것도 음식장사를 하더라. 그래서 아는 것도 없어서 나도 음식장사를 하기로 마음먹게 됐다.”
권 대표는 공단에 근무하면서 겪은 운영의 다양한 실전경험들이 훗날 그의 프랜차이즈 사업을 할 때 상당한 도움으로 작용할 줄 알았을까. 혼자서 큰 규모의 휴게소를 만든다거나 200명 내외의 직원들을 관리한다거나 조직을 꾸리고 운영해 온 노하우 등은 퇴직 후 홀로 독립해 자신의 회사를 운영하는 내내 자신감을 갖게 한 동인이었다. 그가 처음 택한 아이템은 만두였다. 대신 ‘칼끝이 아닌 칼자루를 쥐는’ 쪽으로 가닥을 정했다. 그래서 택한 것이 프랜차이즈 사업이었다.

 

▲ ⓒ사진 주현희 기자

명퇴 후 사업 구상 ‘칼끝이 아닌 칼자루 잡다’
공단에서 알고 지내던 이들과 동업으로 자본금 1억원의 법인을 만들었다. 2007년 3월 (주)보고엔터프
라이즈가 탄생했다. 일단은 휴게소의 지인들을 통해 만두를 납품하면서 프랜차이즈 사업을 병행했다. 가을부터 봄까지는 그런대로 매출이 괜찮게 나오는데 더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손님들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대로 계속가야 되는가. 갈등이 심했다. 이런 답보 상태로 혹시 하며 약 3년을 버텼다. 미련한 행동이었다. 결국 비전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깔린 매장들을 다 철수시킨다. 그리고 일본과 합작으로 만든 만두공장도 정리하기에 이른다. 투자한 돈 일부가 날아가 버린 상태였다. 사회에 나와 홀로 독립해 만든 사업은 이렇게 끝이 났다.
그는 그러나 낙심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항시 긍정적인데다 호기심도 많고 일단 상처를 입어도 좌절할 줄 모르는 낙척적인 기질을 타고난 그였다. 권 대표는 만두 사업을 접을 무렵 알음알음 알게 된 이들로부터 가락동 시장 안에 고기 장사를 아주 잘하는 H사장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간다. 고기별로 자르는 칼이 다 다르고 정육으로 판매하는 수입보다 가공해서 내 놓는 고기들의 수입이 10배가 넘을 정도로 아주 디테일한 방식의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거기서 그는 시간이 지나도 변질되지 않고 육즙이 살아있어 맛있는 가공갈비 등을 보면서 신비의 가루인 ‘육즙보호제’의 비밀을 알게 된다. 육즙이 빠져나가는 것을 방지해 줘 고기의 맛을 계속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이 제품을 보고 그의 빠른 머리회전은 이미 수입소고기에 꽂혀 돌아가고 있었다. 초이스급 쇠고기를 0.8mm로 잘게 썰어 이 육즙보호제를 뿌려보니 맛이 한우와 다를 바 없을 정도로 기가 막혔다. 그는 매장운영대신 납품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대형 식당을 운영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두, 쇠고기, 족발 등이 그를 단단하게 만들다
미국산 쇠고기를 납품받는 가게들에게서 난리가 났다. 기존 가격의 반값에 납품받은 고기가 인기폭발이었기 때문이었다. 납품할 고기집이 하루에 10군데가 넘게 생길 정도로 인기폭발이었다. 이러다 어느 날 갑자기 갑부가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물량이 딸렸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인가 방송에서 광우병 뉴스가 슬금슬금 나오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끝내 광화문에 대규모 시위가 이어지더니 모든 게 끝이나 버렸다. 미국산 쇠고기를 먹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었다. 3억 원을 들여 사 놓은 수입쇠고기를 폐기 처분하는 데에만 무려 2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피해를 최소한 줄이고 손을 뗐다. 두 번째 좌절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또 하나의 육류제품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족발이었다. 그냥 밋밋한 족발을 뛰어넘어 새로운 개념의 족발을 만들면 시장을 흔들어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소스개발을 위해 CJ를 찾아가 의논을 하고 호텔 주방장 출신을 불러다 연구에 몰두했다. 마늘족발, 스파게티족발, 매운불족발 등이 탄생했다. 양념족발인 ‘도새기왕족발’ 브랜드의 설립배경이다. 잘 될 줄 알았다. 그는 신문광고 등 홍보에도 집중했다. 하지만 아이디어가 너무 앞서 나갔다. 손님들은 메뉴들을 보면서 다들 맛있겠다고 해놓고 시킬 때는 막상 일반 생족을 주문했다.
고객들의 인식을 바꾸는 게 너무 힘이 들었다. 가맹점 40개가 될 무렵 그는 아니다싶은 생각이 들어 접기로 하고 가맹점들은 공장과 직거래할 수 있도록 연결해줬다. 그리고는 생선구이, 돈가스 등에도 손을 대 보았지만 자금과 제조공장이 없는 그로서는 역부족이었다. 그 즈음 그는 지방 옥천에서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공단 다닐 때 인연이 된 지인이었다. 한 번 놀러오라는 것이었다. 오랜만이라 술이 거나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닭 공장 기숙사였다. 술에 취하자 누가 이리로 데려온 것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상하는 기회를 잡게 된다. 권 대표가 누구인가. 기회만 포착되면 순간적으로 사업구상과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이 아닌가. 이곳에서 그는 날개와 닭들이 부러진, 정품이 아닌 닭들이 싸게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식품위생법상 아무 문제가 없는 닭들이었다. 그는 전국에 있는 이런 닭들을 다 긁어모았다. 상당히 많은 양의 닭이 모아졌다.
그는 이 닭들을 고온 살균 후 무균상태로 인삼, 대추, 한약재 등을 넣고 고와서 완제품 포장용삼계탕으로 시중유통 가격의 50% 가격으로 판매했다. 소문에 소문이 꼬리를 물자 초복, 중복, 말복 등 45일 동안 물류도매센터에는 전국의 도매상들이 줄을 서 물량을 받아갈 정도로 대박을 쳤다. 그동안 까먹은 창업자금을 복구하는 한편 새로운 사업에의 도전도 가능해진 것이었다.

순간의 기회를 대박으로 만든 ‘완제품 포장용삼계탕’
아이디어의 승리였다. 여름에 잠깐 대박을 친 그는 부산에서 창업박람회가 열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마지막으로 족발의 지방 진출 가능성을 타진하기위해 내려간다. 권 대표는 이곳에서 그의 인생 3막을 여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대구,부산, 마산, 창원 등으로 진출해 모두 50개의 매장을 갖고 있던 대구의 모 국밥집 회장이 그다. 창업박람회에 나온 국밥집 회장은 권 대표의 보쌈김치를 먹어보더니 맛있다고 하면서 자기네 가게에서 팔아보겠다고 제안한다. 그 회장은 지방에서는 크게 성공을 거뒀지만 마지막 꿈은 서울진출이 목표였다. 그래서 권대표가 서울에서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는 걸 알고 그에게 지사장 자리를 제안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서울 장안동에 차린 국밥집의 조짐이 예상을 벗어나고 있었다. 지방에서의 인기와는 달리 서울에서는 반응이 신통치 않은 것이었다. 항아리 뚝배기에다 뜨거운 국물과 밥을 말아서 주는 대구의 식문화가 서울에서는 먹히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국과 밥을 따로 달라고 하고 국을 다시 다 데워달라고 하는 등 문제가 일어나고 있었다. 국밥집 회장과 의견 충돌이 있고 난 후 권 대표는 빠지게 된다. 6개월 후 대구 국밥집도 서울진출을 포기하고 직영점을 모두 철수시킨다. 그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대구에서는 히트를 치면서 왜 서울에서는 안 되는 걸까.
그는 면목동에 보증금 3000만 원에 월 90만 원하는 점포를 얻어 소비자가 만족하는 순간까지 가보자는 결심 하에 가게를 운영하면서 연구를 계속한다. 3500원짜리 국밥을 하루에 400~500만 원씩 팔았다. 곧이어 천호동에 직영점을 오픈하고 막 인기를 끌고 나가려는 찰나인 2010년도에 구제역이 터지기 시작했다. 웬만한 돼지는 다 살처분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나마 있던 순댓국 프랜차이즈 가맹점들도 하나둘씩 문을 닫는 사태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유명 순댓국 브랜드인 S, M 등도 속수무책이었다. 순댓국은 돼지를 잡아야만 영업이 가능한 업종이다.
그런데 돼지들이 땅속에 살 처분되고 있었다. 8000원하던 돼지머리고기가 3만 5000원까지 수직상승했다. 권 대표도 있던 점포들을 천호점만 남기고 모두 문을 닫았다.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 와중에 기회가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순댓국 가게들이 모두 전업이나 폐업을 하는 바람에 순대 파는 가게들이 역설적이게 귀한 점포들이 돼 버린 것이었다. 그는 무주공산의 주인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판단했다.

인생 3막 국밥집 회장과의 조우, 그가 나를 팽했다
가게하면서 알게 된 탕 공장 사장을 만나 동업하자고 제안했다. 2011년 후반기 구제역이 점차 진정세를 보이기 시작한 시점에 맞춰서 다시 순댓국 사업을 꺼내들었다. 주위에서는 다들 미쳤다고 말렸다. 구제역이 진정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순댓국 가게를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1년이 넘게 구제역이 지속되다보니 순댓국에 대한 향수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순댓국 프랜차이즈 사업을 한다니까 주위에서 다들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았다. 주변에는 문을 닫은 업체들뿐인데 무슨 생각으로 다시 순댓국집을 한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나의 판단으로는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제대로만 작품을 만들어 낸다면 분명히 반응이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 많던 순댓국 가게들이 다 사라졌는데 그 빈 곳을 채울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게 나의 소신이었다.”
2012년 초 1호점 문이 열렸다. 이번에는 매장에서 뼈를 삶고 국물을 우려내는 방식이 아닌 공장에서 완제품으로 내보내는 시스템으로 승부했다.
매장에서는 양을 덜어서 끊여주기만 하는 식이다. 권 대표의 판단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순댓국 향수를 맛보기 위해 손님들이 미어터졌다. 가격은 낮추고 맛은 살리고 양은 푸짐하게 내놨다. 소주도 다른 가게들보다 싸게 책정했다. 입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2013년에 이르러 영업조직을 다시 재정비했다. 가맹점이 100개를 돌파했다.

순댓국 가게의 부활, 그러나 회사는 내분에 쌓였다
그러나 한참 신이 나야할 시점에 회사에서는 내분의 기운이 싹트고 있었다. 동업자가 암으로 사망하자 부인이 인수인계를 받고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공장을 물려받고 자신의 딸 이름으로 사업자까지 낸 것이었다. 이어 지금까지 진행해 왔던 계약대로 배당금을 안 주기 시작하고 상표도 자신의 딸 이름 앞으로 등록했다. 가맹점 브랜드 100여 개가 갑자기 다 딸의 소유로 넘어가게 된다. 권 대표는 두 달에 걸쳐 설득했으나 이미 물건너 간 뒤였다. 그는 가맹점들을 포기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는다. 브랜드는 초기에는 같은 이름을 사용했지만 올해부터 상호를 <큰맘할매순대국>으로 바꾸고 모델도 교체했다.
2014년 초 불광 1호점을 오픈했다. 그는 할매순대국의 최초의 설계자였다. 비록 가맹점 100여 개를 넘겨주고 나왔지만 모든 구상은 그의 머리에서 나온 결과물들이었다. 그는 다시 업그레이드해서 할매순대국 프랜차이즈 사업의 시동을 걸었다. 그의 구상대로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기름기를 걷어낸 순살코기 편육을 보고 감동을 하는 이들이 생기는가 하면 진한 사골국물에 코를 박듯이 들이마시는 풍경은
이제 흔한 광경이 돼버렸다. 머리고기도 시중가격보다 저렴하게 가맹점 공급가격을 인하했다.
예비가맹점주들에게 순마진 20%를 공개적으로 약속했다. 그렇지 않으면 본사에서 부족한 부분을 책임져 준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육수와 소스의 공급가도 세 번에 걸쳐서 계속 인하해 가맹점에 내려 보냈다. 맛도 좋은데 가격까지 저렴하니 손님들이 밀려들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 됐고 거기에 국물, 밥 등도 달라는 대로 퍼주니 더 이상 경쟁자가 나올 수가 없는 형국이었다.
권 대표의 철학은 무조건 가맹점주가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맹점주가 돈을 벌지 못하면 가맹본사의 존재이유가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올해 8월말로 가맹점이 400호점을 돌파했다. 첫 점포 오픈한지 26개월만이다.

“가맹점주가 돈을 벌지 못하면 본사 존재이유 없어”
한 달에 꼬박 15~16개씩 쉼 없이 오픈해야 가능한 수치다. 어쩌다 몇 개월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26개월을 매번 이런 식으로 오픈했다는 건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걸 권 대표가 해 낸 것이
다. 게다가 가맹점주 한 사람이 2개 이상씩 하는 이들이 절반을 넘긴다. 그만큼 수익이 보장된다는 의미다. 이제는 관리 분야를 강화하고 있다. 가맹점 30개 점포마다 슈퍼바이저 한 사람을 밀착 배치해 혹시 소홀해질지 모르는 가맹점의 관리를 해결하는데 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9월부터는 고속도로 휴게소에도 진출할 계획이다. 이미 협의가 다 된 상황이어서 조만간 수십 개의 점포가 입점하게 된다.
중국 진출을 위해서도 2년간 공을 들여왔다. 올해 말까지 10개의 직영점을 오픈할 계획이다. 지점장들은 다 유학파들을 채용해 현장을 원활하게 꾸려나갈 예정이다. 이후에는 상황을 봐 마스터프랜차이즈로 풀어나갈 방침이다.
이어 베트남, 홍콩도 내년 초에는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게 된다. 그는 아직 목이 마르다.
이제 시작이라고 말한다. 성공의 첫 글자인 시옷자도 시작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냥 주변 사람들과 더불어 할 수 있는 일을 만들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내후년까지 가맹점 1200개가 목표다. 소주 2병이 주량인 그의 털털하고 생기 있는 목소리를 듣고 싶은 이들을 얼마나 더 많이 만드는가 하는 건 오로지 그
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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