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가장맛있는족발의 <가장맛있는 족발>최종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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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장맛있는족발의 <가장맛있는 족발>최종완 대표
  • 창업&프랜차이즈
  • 승인 2015.08.0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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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발 가업 3대의 명가 최고 프랜차이즈로 승화하다
▲ (주)가장맛있는족발의 <가장맛있는 족발> 최종완 대표 ⓒ사진 주현희 기자, 캐리커처 원소정 작가
   

가맹점 대부분이 맛집으로 불릴 정도로 맛에 대한 집념이 오늘을 일궈
(주)가장맛있는족발의 최종완 대표는 부드러운 마스크로 인상이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 CEO다. 3대째 가업으로 내려온 족발 맛집을 최고의 프랜차이즈 브랜드로 만든 그는 지금까지 모든 업무를 직접 관장하고 챙기는 전형적인 올라운드 플레이어 경영주다. 제조 공장이 있는 수원에 직접 가서 10시간이 넘게 육수와 소스 만드는 과정을 일일이 체크하고 나서 잠자리에 든다. 남보다 일찍 일어나고 더 늦게 잠자리에 들 정도의 일벌레 스타일로, 진중하면서도 과감한 베팅도 서슴지 않는 결단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프랜차이즈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3년도 채 안 돼 200개가 넘는 가맹점을 오픈하는가 하면 불황의 시대에도 대기자가 50여 명에 이르고 있을 정도로 인기 절정이지만 본부는 엄격한 심사를 거쳐 점포를 전개해 나가고 있다. 평균 매장 규모도 99~132㎡(30~40평)의 중대형으로 대부분 지역에서 소문이 날 정도로 뛰어난 맛을 자랑하는 족발 브랜드지만 최대 300호점 이상은 확장하지 않을 계획이다. 장수 브랜드를 위한 방안이지만 가맹점들을 위한 그만의 배려다. 가맹점으로 돈 좀 듬뿍 벌었다는 점주들의 얘기를 많이 듣고 싶어하는 CEO로 일이 바빠 아직 솔로다.
 

▲ 최종완 대표 ⓒ사진 주현희 기자

너무 싫었던 족발과 하루 700만 원의 매출
어릴 적,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서 용돈을 받으면 그 돈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고는 했다. 친구들이 늘 “너한테는 한약 냄새가 난다”, “너랑은 안 놀아 냄새나 저리가”라며 따돌림을 받았다.

난 아버지가 족발 장사를 하시는 것이 싫었다. 다른 집 아이들처럼 그냥 넥타이 매고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는 그런 평범한 아버지였으면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하곤 했다. 아침 일찍 부모님이 모두가 장사를 나가시면 온갖 집안일은 모두 내 차지였고 사춘기 학창시절에 가정소개서에 아버지 직업을 거짓으로 적어내기도 하였다. 그때는 왜 그리도 족발이 싫었는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끔 혼자 웃고는 한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족발로 하루 700만 원(한 매장에서) 매출을 일으키는 족발집 사장이 되었다. (중략…….)

어릴 적 밤늦은 시간에 장사를 마치고 돌아오신 아버지는 늘 족발의 가장 맛있는 부위를 싸가지고 오셔서 잠든 나를 깨워 먹이시곤 했다. 그게 아버지의 사랑이란 것을 알아버린 지금은 눈물로 후회하며 너무나도 그때가 그리워진다.
<과거 어느 날의 일기장 중에서>

일기장 한 갈피를 장식한 이 가슴 뭉클한 사연은 아주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족발’의 최고봉에 오른 브랜드인 (주)가장맛있는족발(이하 가족)의 메인 홈페이지 첫 번째 코너에 실린, 탄생에 얽힌 스토리다. 이 회사는 현재 족발전문 프랜차이즈 기업으로 가맹사업을 시작한 지 3년도 채 안 돼 오픈한 가맹점만 200개를 넘어서고 오픈이 예정돼 있는 점포만도 30개에 이르는 경이로운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그것도 프랜차이즈 업계에서 대기업군으로 분류되는 N사, O사, H사 그리고 선두주자였던 T브랜드 등과의 치열한 경쟁에서 거둔 성과라는 면에서 독보적이라 할 만하다.

대기업형 브랜드들과 경쟁서도 승승장구 ‘전설’
프랜차이즈 족발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군계일학’인 셈이다. 평균 매장 규모도 중대형급인 99~132㎡(30~40평)대에 이른다. 특히 최악의 불경기로 불리는 요즘 경제상황하에서도 매년 70~80개의 가맹점들을 유치해 타 브랜드의 CEO들이 그 비결이 무엇인지 궁금해 할 정도로 세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 회사의 최종완 대표(39)는 이로 인해 프랜차이즈 업계에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젊은 CEO다.
그에게는 남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그 어떤 대박의 비책이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날 때부터 성공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것일까. 외부 활동이 뜸한 그에게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아마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부드럽고 편안한 얼굴선이 눈에 들어온다. 훈훈한 인상에서 가식이 묻어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건 실수다. 그런 상황에서의 대화는 소통이 되고 기억을 남긴다. 그와의 첫 대면이 그렇게 조율되고 있었다. 솔직담백한데다 적당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주는 힘은 아마도 신뢰와 믿음으로 이어져 흡입력으로 승화되는 일일 것이다. 그의 대화법은 늘 이런 것일까. 바쁘되 쫓기지 않는 정중동의 힘은 상당히 노련한 인생 담금질의 유산이다. 그에게서 그걸 보게 된다. 하지만 훈남의 이미지에서 가끔 고독한 승부사의 그림자가 드리워 질 때면 영락없이 한 사업가의 앵글로 돌아간다.
할아버지, 아버지에 뒤이어 3대째 족발 장사를 하고 있는 최 대표는 42년간 족발을 생계삼아 가계를 영위해 온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회사 홈페이지 첫머리에 올려놓았듯 처음에는 무척이나 족발을 싫어했다. 족발 냄새로 인한 친구들의 놀림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가 부모의 장사 덕에 숨겨져 있던 재능 하나를 알게 되기엔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3대째 이어져 온 족발, 어릴 때부터 음식 잘해
부모가 장사를 하러 나가면 집안일은 2남 1녀 중 장남인 그의 몫이었다. 그래서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떡볶이, 부침개, 호떡 등을 혼자서 만들어 먹곤 했다. 웬만큼 간단한 요리는 다 할 줄 하는 어린이였다. 이런 음식 만드는 경험은 훗날 그가 프랜차이즈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때 조력자 역할을 톡톡히 해 준다. 고교 졸업 후  피아노를 배운 기본을 토대로 음대에 진학을 했으나 뜻이 맞지 않아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그리고는 고향에서 유명 맛집으로 인기가 높은 <한양왕족발>가게에 나가 부모 일을 도와주면서 본격적으로 족발과 인연을 맺게 된다.
학교를 다니느라 서울에 거처를 둔 그는 고향인 안성을 오가면서 가게 일을 돌봤다. 이 일은 군대를 갖다 와서도 계속 되고 그는 점점 더 족발과 필연을 맺어가기에 이른다. 안성 가게의 유명세는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커져갔고 족발전문점으로서 그의 자부심도 나이와 함께 쌓여갔다.
“어릴 적에는 친구들이 족발의 누린내와 한약냄새 때문에 놀리고 그러는 통에 집이 족발 장사한다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아버지 직업을 쓰는 칸도 거짓으로 쓸 정도였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람들이 가게 앞에 줄을 서 먹을 정도로 인기가 좋다는 것을 알고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자부심과 함께 족발에 대해 창피하게 생각했던 과거 시절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찾아주는데 무엇이 창피하고 부끄럽단 말인가…….”
안성의 <한양왕족발>이 유명 맛 집으로 인기를 끌자 주변의 지인들이 최 대표에게 한마디씩 툭하고 던지곤 했다. “이렇게 유명 맛집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데 시골 안성에만 있기에는 너무 아깝다. 그러니까 서울 진출도 한 번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자주 비슷한 얘기를 듣다보니까 마음에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울이 어디인가. 눈 뜨고도 코를 베어간다는 곳이 아닌가. 특히 외식업계의 최대 격전지가 서울이 아니던가. 마음이 동요하자 고민도 깊어졌다.


“시골에 있지 말고 서울로 진출해 봐” 결단 기로에
하지만 그의 꿈도 꿈틀거렸다. 이왕 장사를 하는 것 한 번쯤은 서울에서 도전을 해봐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족발 맛 하나만은 전국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는 자부심이 그의 뒤를 떠받치고 있었다. 그래, 한 번 도전해 보자. 최 대표는 결단을 내린다. 족발 집안의 맛집 명예를 건 서울 진출이었다. 2009년 7월 사당역 인근 후미진 D급 뒷골목 안 주택가에 자리를 잡았다. 부모의 도움 없이 자신이 아르바이트와 틈틈이 모은 돈으로 가게를 얻다보니 좋은 자리에 터를 잡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의 나이 32살 때였다.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120만 원인 66㎡(20평) 가게에서 처음에는 거의 홍보가 되지 않아 족발을 5~6개 팔아 20만 원의 매출을 올렸다. 시간이 더디게 흘러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 달이 지나자 한 번 온 고객들이 못 보던 다른 손님을 다시 데려오는 것이 아닌가. 계산한 후 함께 나가면서도 “아주 맛있게 먹었어요”하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들이 한두 번도 아니고 자주 일어나다 보니 희망의 싹이 보였다. 조금만 더 버텨 가게가 어느 정도 알려지면 장사가 잘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의 예지력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치밀한 수읽기에 능한 그는 확신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을 만큼 통찰력이 뛰어났다. 3개월이 지나자 12개 테이블이 모두 차기 시작했다. 모두 맛있다는 평가도 빼놓지 않고 해주고 갔다.
“가게를 처음 오픈하고 족발 5~6개를 팔 때 불안했지만 자신감은 있었다. 그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모두들 맛이 있다고 하면서 갔기 때문이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족발을 처음 먹어본다면서 살살 녹는 맛이 제 맛이라고 칭찬하는 손님들이 많았다. 게다가 한 번 온 손님들이 다른 지인들을 데리고 다시 방문하는 상황들이 자주 있다 보니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될 수 있겠구나 했다. 3개월을 넘기면서는 줄을 서야만 먹을 수 있는 족발집이 되어가고 있었다.”

▲ 최종완 대표 ⓒ사진 주현희 기자

사당역에 둥지 튼 1호점, 3개월 지나자 대박집 되다
이 당시 그가 내놓은 족발은 다른 가게들과 달리 즉석에서 한약재로 푹 삶아 따뜻하고 부드러운 맛이었다. 부모의 가게를 돌봐주면서 고객들이 어떤 족발을 더 좋아하는지 면밀하게 연구해 온 최 대표는 손님들 80~90%가 차갑고 딱딱한 족발보다 맛이 부드럽고 살살 녹는 뜻한 식감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10여 년 동안의 현장 생활에서 경험해 알고 있었다. 주문한 즉시 오양, 감기, 월계수잎 등 13가지 한약재를 넣고 다린 육수에 생족을 푹 삶아 고은 다음 곧바로 내 놓는 방법을 오랜 기간 연구하고 터득해 상품화한 것이었다. 이 ‘마법의 맛’이 알려지면서 6개월 후에는 가게와 붙어있는 뒷집을 터서 132㎡(40평)으로 확장하기에 이른다.
이미 사당역점은 족발 맛집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1년이 지나면서는 앉을 자리가 부족해 2층으로까지 장소를 넓히게 된다. 1, 2층 합해 232㎡(70평) 규모로 가게가 크게 번성하자 매출도 급격한 증가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하루 20만 원에서 200만 원으로 오르고 다시 평균 600~700만 원까지 기록하는 놀라운 성장세를 이룬다. 1년 만의 대박이었다. 최 대표는 2년 후 서울에서의 가능성을 눈으로 확인하자 과감한 투자를 결심한다. 구로디지털단지내에 198㎡(60평) 규모로 역시 입지가 그다지 좋지 않은 장소에 가게를 오픈했다.
그는 입지가 다소 약해도 맛과 서비스가 좋으면 고객은 반드시 다시 방문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는 CEO다. 이번에도 사당역점과 비슷한 입지에다 2호점을 오픈한 것이었다. 오픈 첫 달에는 500만 원의 매출을 올렸다. 그러나 이곳도 3개월을 넘기자 맛에 끌린 고객들의 재방문이 이루어지면서 대박의 가게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월 1억 8000만~2억 원의 판매액을 올려 최 대표의 기대감을 더욱 부풀게 만들었다. 서울 입성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하는 우려가 점차 씻겨 갔다.

직영 2, 3호점 연속 대박 행진…프랜차이즈 ‘꿈틀’
오픈한 가게들이 짧은 기간 안에 자리를 잡아가자 그는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사업을 계속 확장시켜 나가는 통 큰 베팅을 하게 된다. 구로디지털점을 오픈하고 난 지 4개월 후 그는 이번에는 방이동에다 3호점을 연다. 2개의 직영점을 2년 반 동안 운영한 경험과 3대에 걸쳐 맛 집으로 유명하게 된 조리 비법을 총 동원해 만든 방이 직영점은 오픈한 달부터 1억 5000~1억 8000만 원의 전표를 찍었다.
다들 입이 쩍 벌어질만한 매출이었다. 이번에도 입지와 앞을 내다보는 최 대표의 통찰과 결단의 합작품이 만들어 낸 성공이었다. 그는 자신감이 한층 더 붙었다. 이제는 프랜차이즈 가맹사업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수준에까지 이른다. 그의 장기인 수읽기가 작동된 결실이었다. 이 시점이면 가맹사업을 해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셈법이 나왔다. 2012년 6월 프랜차이즈 본사를 설립한데 이어 구로점과 방이점을 각각 지인들에게 넘겨주고 가맹 1, 2호점으로 등록한 후 프랜차이즈 사업의 첫 발을 내딛는다.
“일단 족발의 맛만큼은 어느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는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나로 이어지는 족발에 대한 맛은 오랜 시간에 걸쳐 비법이라고 부를 정도까지 잘 체계화 되어있다. 그래서 서울에 점포를 오픈해도 많은 고객들이 맛있다고 환영해주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이 맛을 많은 이들하고 공유하고 싶은 생각에 프랜차이즈 사업을 구상하게 됐다. 특히 서울 직영점 3개의 대박은 이런 구상을 더욱 앞당기게 해 준 기폭제가 됐다.”
그는 가맹사업을 염두에 두고 이번에는 영등포에다 점포를 오픈할 계획 하에 가게 터를 물색했다. 어느 날 입지가 눈에 들어 온 한 점포가 있었는데 손님이 거의 없는 족발집이었다. 지금까지 다른 부동산 업자가 찾아오면 대꾸도 하지 않았다는 집 주인은 이상하게도 최 대표와는 2시간을 넘게 대화를 이어가고 있질 않는가. 그의 편안하고 훈훈한 이미지 덕분이었다. 하지만 대화는 이상하게 꼬여 들어갔다.

가게 팔라고 한 곳도 오히려 가맹점 내달라 졸라
가게를 팔라는 최 대표의 제안은 고사하고 오히려 그 곳에 최 대표의 족발집을  차려달라는 게 아닌가. 물론 최 대표가 운영하는 가게들을 다 방문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영등포점은 그의 직원 5명이 상주하며 가게를 살리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드디어 3개월이 지나자 1억 원이 넘는 매출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2013년 1월쯤이었다. 영등포 3호점이 대박을 터트리자 점주는 200m 이웃에 영등포 4호점을 추가로 오픈한다. 역시 월 1억 원 내외의 대박 수준이었다.
그러자 그는 가맹 사업을 착실하고 체계적으로 다져나가기 위해 수원에 992㎡(300평) 규모로 소스 등 제조 공장을 마련한다. 이번에는 가까운 지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가맹점을 내달라고 매달리는 게 아닌가. 한 점포를 운영해 성공할 때만 해도 운이 좋아서 그랬거니 생각했던 지인들이 3~4개가 모두 대박이 나자 실력으로 성공했다는 사실을 믿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런 배경에는 최 대표의 철두철미한 관리가 절대적으로 작용했다.
그는 가맹사업을 시작하기 이전부터 점포의 메뉴, 브랜드, 인테리어, 디자인 등 모든 분야에 직접 나서서 해결해 왔다. 지금의 수제 특제소스와 육수 등도 모두 그의 손을 거쳐서 완성된 것이었다. 그가 직접 관여하는 이유는 족발의 숙성시기와 육수가 맛에 상당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육수는 일단 13가지의 한약재를 넣고 5시간 동안 끓이고 달인다. 숙성도 일주일 동안이나 시킨다. 부모님 세대가 해 온 그대로 비법을 지키기 위해 족발을 삶아서 가맹점에 제공하거나 OEM방식에 의존하지 않고 지금까지 직접하고 있다.
 

▲ 최종완 대표 ⓒ사진 주현희 기자

몸소 일일이 체크 관리, 해마다 70~80개 오픈 ‘기염’
수원 공장에서 20kg짜리 300통을 하루 12시간 동안 끓이는 작업을 하는데 하루 10시간 상주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낮 2~3시에 가서 새벽 3~4시에 오곤 한다. 양념이나 불조절 등은 꼭 최 대표가 해야 하는 몫이어서 그렇다. 최근에는 소스를 넣어도 맛이 제대로 나오게끔 개발을 한 덕에 장시간에 걸친 피로감은 많이 줄어든 상태다. 족발전문 프랜차이즈 브랜드 <가족>은 주문 즉시 매장에서 본사 공장에서 공수돼 온 육수를 가지고 제때에 삶아 고객에게 내놓는 족발로 맛에서는 그 누가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고객들에게 인기 최고다.
이런 연유 때문인지 본격적인 가맹사업을 시작한 첫 해인 2013년도에 70~80개 점포를 오픈한데 이어 다음해인 2014년에도 이 열기를 이어 비슷한 숫자의 가맹점을 오픈, 모두 150여 개의 점포를 개설했다. 그리고 올해 들어서도 이 여세는 굽힐 줄 모르고 더욱 탄력을 받아 상반기에만 모두 50여 개가 새로 가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 점포입지를 찾고 있는 예비 가맹점들도 모두 30여 개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가족>의 성공은 아이러니하게도 기업형 프랜차이즈 본사들이 족발 사업에 뛰어들게 만드는 단초를 제공한다. 하지만 3대가 쌓아놓은 맛의 비법들과 고객을 향한 절대적인 서비스 정신으로 무장한 <가족>의 들불 같은 가맹점 확장 바람은 아무리 대기업형 브랜드들이라도 잠재울 수가 없었다. 처음 가맹사업을 시작할 무렵 40여 개의 점포로 선두를 달리던 모 브랜드를 제치고 단연 국내 최고, 최대의 족발 프랜차이즈 회사로 자리 잡아 나가고 있다.

99~132㎡(30~40평) 매장 230개 만든 시골 족발의 위대한 힘
본격적인 가맹사업시작 2년 반 만에 중대형 점포 230여 개를 오픈 또는 계약한 신화를 쌓은 최 대표에게 위기는 없었을까.
“사실 작년에 대기업형 프랜차이즈 본사들이 족발 가맹사업에 뛰어들었을 당시 걱정을 많이 했다. 대형 프랜차이즈를 이길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까지의 상승무드가 혹시 꺾이지나 않을까. 큰 기업이니만큼 더 맛있지나 않을까 하는 등의 생각을 많이 했다. 그래서 걱정만 하는 것보다 대안으로 새로운 메뉴개발에 신경을 많이 썼다. 그 대표적인 신메뉴가 바로 여성층으로부터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는 ‘불족’이다. 불에 직접 매운 양념으로 구워서 매콤한 맛을 내는 게 특징이다. 그리고 업계 최초로 시도한 오리지널 족발과 불족을 반씩 섞은 ‘반반족발’도 반응이 꽤나 좋았다.”
최 대표는 가맹점이 많아진 만큼이나 부담감도 크다. 자신의 브랜드와 회사를 믿고 가맹점을 오픈한 점주들이 모두 다 매출이 잘 나와 성공했으면 좋겠다는 바람과는 달리 운영이 잘 안 되는 가맹점들을 바라볼 때면 마음이 항상 편치 않아서다. 그래서 가끔은 무거운 책임감으로 인해 자신의 직영점만 운영했을 때가 더 좋았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자신도 프랜차이즈 가맹사업을 시작한 이후 3년 동안 한 번도 여행을 다녀온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람을 느끼는 건 점주들의 행복한 모습 외에도 2015년 머니투데이 선정, 소비자만족 대상을 수상했을 때이다. 바로 고객들로부터 받는 상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장수 브랜드 위해 가맹점 300개 이상 안 할 계획”
지금도 가맹상담 외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수원 공장에서 보내고 항상 시간에 쫓겨 끼니도 놓쳐버릴 때가 많다. 족발의 맛을 좌우하는 육수와 특제소스의 제조는 어느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어서다. 고객들의 입맛을 변함없이 잡기 위해서는 정확하고 일정한 수준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족>의 점주들 가운데는 한 가족이 6~7개의 가맹점을 운영하는 사람이 둘씩이나 있고 2개 이상 운영하는 사람은 10여 점주가 있을 정도로 가맹점 밀집도와 충성도가 꽤 높다.
최 대표의 목표는 내년까지 300호점을 이루고 <가족>이 장수 브랜드로서 롱런할 수 있도록 기틀을 차곡차곡 다져나가는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는 그의 양 어깨에서 족발의 튼실함과 형형한 기운이 내려앉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오롯이 그의 뚝심 있는 소신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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