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족발 시크릿 레시피> 차경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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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족발 시크릿 레시피> 차경철 대표
  • 창업&프랜차이즈
  • 승인 2014.02.12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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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배달 초등생이 인천 명물 CEO로 거듭나다


Profile                                       

현장에서 겪은 디테일한 고생덩어리를
황금알을 낳는 요람으로 바꾼 억척 CEO

죽음까지도 생각하게 만들었던 어린 시절의 지독한 가난. 부모의 손을 잡고 한창 등하교를 해야 할 나이인 초등학교 1, 2학년 때부터 신문과 전단지를 배달해 온 <장모족발 시크릿 레시피>의 차경철 대표는 말 그대로 입지전적인 CEO다. 고생을 해보지 않을 것 같은 준수한 외모와는 정반대로 그는 험하고 힘든 사회의 밑바닥을 어린 시절부터 온 몸으로 부대끼며 자라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잡초같이 질기고 강인한 성정이 아니었다면 그는 벌써 그렇고 그런 뒷골목 인생의 한 단면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겪었을 그 시절이 잔영처럼 남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가진 경영자이기도 하다. 20살 때 첫 노점상에 도전했다가 좌절하고 27살 때 돈가스 전문점으로 실패를 맛 본 그는 아르바이트라면 안 해본 게 없을 정도로 다 섭렵한 ‘아르바이트의 파수꾼’이다.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시작한 중국마사지에서 빛을 발한 그는 드디어 오랜 꿈인 외식업으로 전향을 해 족발의 명인으로 거듭나게 된다. 그것도 3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이룬 대성공이다. 그런 그가 <장모족발 시크릿 레시피>라는 제 4세대 신개념 족발전문점을 론칭하고 또 다시 대박행진을 벌이고 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지금 주목되는 이유다.

▲ 차경철 대표 ⓒ 커리커처 원소정 작가

족발의 ‘제4세대’ ‘시크릿 레시피’ 반응 폭발적
살갑고 부드러운 바람이 든다. 지치고 힘들었던 마음을 헤아리는 듯 포근하게 감싼다. 심한 자책과 끓어오르는 분노로 얼마나 많은 날들의 밤을 설쳤던가.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속담이 남의 일이 아니라는 현실이 느껴지는 세월의 모퉁이에서 가슴앓이로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던 기억이 악다구니처럼 다시 일어난다. 인천의 맛집 명소로 알려지면서 분점을 내달라고 사정하며 조르던 사람들의 배신, 분점을 넘어 오히려 본점 행세까지 하며 가게를 위기에 빠트린 이들, 이로 인한 이미지 손실과 고객들의 딱한 시선 등. 그러나 이 모든 게 끝났다. 새로운 개념의 제 4세대 신상품이 3개월간의 숙성을 거쳐 완벽하게 탄생됐기 때문이다. 매출이 고공행진하고 있다. 가슴에 맺혔던 응어리가 언제인가 싶다.

인천의 끝자락 용현동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해 전 지역의 맛집 명소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장모족발>의 차경철 대표(35)는 최근 새로운 개념의 제 4세대 족발전문점인 <장모족발 시크릿 레시피>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그 다운 환한 미소를 되찾았다. 148.7㎡(45평) 매장 규모에서 월 2억원 가까운 매출을 올리면서 족발의 새로운 맛집 명소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인기에 힘입어 자주 찾는 고객들로부터 가맹점을 내달라는 러브콜도 부쩍 늘고 있다. 현재 <장모족발>은 본점 외에 전수창업으로 오픈해 준 가게가 16개가 있다.

인천 지역에서는 최고의 족발 맛집과 명물로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 그가 최근에는 기존의 <장모족발>의 장점을 살리는 동시에 신상품 메뉴들을 크게 보완해 마련한 <장모족발 시크릿 레시피>를 내놓고 바람몰이를 하고 있다. 그것도 3년만의 대변신이어서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한식은 변화가 더딘 외식 분야다. 전통을 강조하다보니 기존의 틀을 허무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어려운 작업을 차 대표는 짧은 기간에 과감하게 현실화시킨 CEO다.

경영인으로서의 결단력을 엿볼 수 있는 한 단면이다. 물론 이는 <장모족발>의 폭발적인 인기를 악용해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일부 점주들의 불순한 의도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뜻도 담겨있다. 그 흔한 족발을 지역의 최고 맛집 명소로 올려놓고 3년 만에 또 한 번의 변신을 시도한 차 대표는 어떤 경영인인가. 그 짧은 기간에 맛집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한 그의 진면목은 과연 무엇인가. 그가 궁금하다.

3년만에 ‘명품’ 반열 뒤엔 신의 한 수가......
선하고 착한 이미지가 차분하게 자리하고 있다. 누구와도 교감할 수 있을 것 같은 친근감이 그의 긴 속눈썹 안의 까만 눈동자에 깃들어 있고 웃음으로 지어지는 다정하고 인정스런 눈매는 꽤 인상적이자 매력이다. 그러면서도 간간이 내비치는 날카로운 눈빛에서는 지난날 삶의 여정이 결코 간단하지 않을 메시지가 묻어있다. 그래서 더욱 그의 눈가는 시선을 붙든다. 선함과 강함이 묘하게 교차하는 언밸런스를 품고 있는 탓이다. 어법도 눈길을 끈다.

자신의 생각을 이리저리 재지 않고 직선적으로 말하는 대화의 투가 그렇다. 그가 남의 시선을 그다지 따지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해결해 내려는 의지가 강하다는 방증이 아니겠는가. 3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족발을 메뉴로 삼아 ‘명품’의 반열에 올려놓았으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거기에는 분명 ‘신의 한 수’라는 그만의 비책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그의 35년이라는 책갈피를 넘기고 싶은 것이다.

차 대표는 곱상한 도련님 분위기와는 별개로 어린 시절은 처절할 정도로 가난을 머리에 이고 살았다. 부모의 잦은 별거와 이혼으로 인한 후유증은 그렇게 어린 시절을 짓누르고 있었다. 웬만큼 어렵게 살아왔다고 하는 이들의 가난도 그가 겪은 고생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다.

초등학교 1, 2학년 친구들이 부모의 손을 잡고 집으로 향하고 있을 즈음 그는 두 살 터울인 동생과 수레를 끌며 신문배달을 하러 다녔다. 생계수단으로서 배고픔을 면하는 게 우선이었다. 아무도 돌봐주지 않은 어린 두 형제는 그렇게 세파와 부딪히며 삶을 이어갔다. 초등학교 어린이에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신문배달하고 전단지 배포밖에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타고난 자산이 하나 있었다. 바로 긍정의 힘이다.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나도 잘 살 수 있다” 등의 희망적인 꿈들을 가슴 한 구석에 품고 버리지 않았다.

 

▲ 차경철 대표 ⓒ 사진 박세웅 기자

찢어지게 가난한 어린 시절, 신문배달하면서도 희망가져
“그 어린 나이에 너무 힘이 들어 죽고 싶은 충동을 여러 번 느꼈다. 왜 나는 또래 친구들처럼 학교 갔다 오면 놀지 못하고 신문을 배달해야 하나하는 생각에 무척 괴로웠다. 그리고 신문을 배달할 때 친구들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창피한 생각에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언젠 가는 반드시 가난에서 벗어날 때가 있을 것이고 나도 한 번 잘 살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생각으로 버텼다. 그러지 않았으면 열악한 환경에서 잘못된 길로 들어섰을지 모르는 일이다.”
차 대표는 고교 졸업 후 드디어 성인의 무대에 입성하면서 더 큰 행복감을 맛본다. 어린 시절보다 일할 수 있는 업종들이 훨씬 많아졌기 때문이다. 우선 오토바이 운전부터 배웠다. 그리고 목표를 세웠다. 일단 100만원을 모아 장사를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음식점 배달, 막노동, 신문배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드디어 100만원이 모아졌다. 부천역 앞에 가판대를 사서 토스트, 김밥, 어묵을 파는 등 본격적으로 노점상을 시작한다. 그러나 장사 기술이 어디 한 순간에 터득되는 것이겠는가.
오픈만 하면 저절로 될 줄 알았던 노점상이 생각처럼 장사가 잘 안되는 가운데, 그는 눈썹이 다 그슬릴 정도의 가스폭발 사고를 당하게 됐다. 이 사고를 계기로 차 대표는 노점상을 접게 된다. 그가 20살 초반에 맛 본 사회의 냉정함과 장사 기술의 절실함이었다. 이후 그는 학업에 뜻을 둬 상지대에 수석으로 입학하게 된다. 지방대를 선택한 것도 등록금 때문이었다. 무역학과를 다녔던 그의 이상은 베스킨라빈스 같은 프랜차이즈 기업이었다. 좋아하는 초콜릿으로 꿈을 키워보려 했으나 해외 유학이 필수다시피해 중도에 포기하게 된다.
그는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을 하고, 대신 돈을 벌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리고 23살에 동생과 군대를 같이 갔다. 어려울 때부터 의지하며 함께 성장한 형제는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었지만 둘만의 신의와 우애는 남달랐다. 25살 군 제대 후 차 대표는 본격적으로 일에 매달린다. 1000만원의 사업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하루 24시간을 48시간처럼 쪼개서 일을 했다. 물론 동생도 창업자금에 동참하러 뛰었다. 20살 때 처음 한 노점상의 충격적 경험은 그의 준비성을 한층 더 강화하게 만들었다. 하루에 아르바이트 세 군데를 뛰었다. 저녁 10시부터 다음 날 오전 10시까지는 PC방에서 근무하고 11시까지 아르바이트 비용을 더 얹어주는 뚝배기 한식당으로 출근한다.

군 제대 뒤 3가지 아르바이트,
1년 만에 1000만원 모아

이 일이 끝나는 4시 이후에는 1시간 잠깐 눈을 붙인 후 다시 마트로 장소를 옮겨 9시까지 일을 보고 다시 PC방으로 향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공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공무원 시험을 보기 위해 짬짬이 서적을 뒤적였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공부를 좀 한다싶으면 자꾸 사업에 대한 아이템이 떠올라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조화란 말인가.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자리에 앉아서 공부할 스타일은 아닌가 보네” 그는 공부를 접고 다시 아르바이트에 집중하면서 사업구상을 가다듬는다. 한 달간 벌어들인 수입은 230~250만원 선이었다.
꿈에 부풀었다. 이대로 계속 일을 한다면 돈을 꽤 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5~6개월이 지나자 몸이 점점 시들시들해져 가는 게 아니겠는가. 거의 잠을 안자고 강행군을 한 탓이었다. 27살 되던 해 드디어 1000만원의 자금이 모아졌다. 동생과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 두 번째 창업에 도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동생하고 거의 같은 시기에 제대를 하고 나서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다녔다. 특히 위험해서 비용을 더 주는 배달 일을 찾아 다녔다. 한 1년이 다 돼갔을까. 가족 생활비 등을 제외하고 드디어 1000만원의 창업자금이 손에 쥐어졌다. 뛸 듯이 기뻤다. 무엇보다 가난에서 벗어나는 게 목표였다. 이번 창업아이템은 그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얻은 다양한 경험으로 정말 잘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동생의 추천으로 창업 아이템은 돈가스 전문점으로 정했다. 자신은 한식집 아르바이트를 했고 동생은 피자, 돈가스, 우동 등 패스트푸드 분야의 아르바이트를 주로 했다. 특히 동생이 배달했던 <배터지는 돈가스>라는 브랜드는 하루 종일 배달 일을 해야 할 정도로 인기 폭발이었다. 그 영향이 컸다. 두 사람은 곧바로 연구에 들어갔다. 그는 메모광이다.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큰 그림까지 일일이 메모를 하고 사전에 탐색한다. 이번에도 그는 돈가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서적을 뒤져가며 공부해 나갔다. 13가지의 돈가스 모델이 탄생했다.
부천 원미동에 가게를 얻었다. 500만원 보증금에 월세 30만원하는 가게를 얻고 주방아주머니 한 사람을 고용했다. 그런데 계획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가정집에서 돈가스를 자주 먹을 리 없는데다 운영자금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장사를 하다 보니 매일 돈에 쫓기는 상황이 발생했다. 아주머니의 월급을 주기 위해 신문배달을 해야 하고 또 신문배달을 하다 보니 몸이 피곤해 업무에 지장을 받는 등 악순환이 반복됐다. 배달 영업도 생각보다 원활하지 못해 수입이 한정적이었다.

두 번째 ‘돈가스’
배달전문점 1년만에 문 닫아

식자재, 인건비, 월세 등을 제하면 200~300만원 남았다. 이런 상황이 1년간 계속 이어지자 회의가 들기 시작한다. 이럴려고 장사를 시작한 게 아닌데 하는 초조함이 밀려들었다.
“창업 준비를 좀 더 철저하게 했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에 후회 막급했다. 준비한다고는 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그 정도 준비 가지고는 너무 부족했던 것이었다. 그는 동생에게 솔직히 시인했다. 자본금도 자본금이지만 너무 준비 없이 시작한 것 같으니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보자고 차 대표는 1년 만에 가게를 접는다. 그는 판단이 서면 실행은 전광석화다. 행동을 빠르게 실천하는 스타일이다.
“돈가스 장사를 접고 한 동안 허탈감을 감출수가 없었다. 사전에 준비를 한다고 했는데도 막상 실전에 들어가니까 여기저기 빈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적은 창업자금도 문제였지만 우리가 하고자 하는 분야에 대해 공부와 정보가 많이 부족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 두 번째 창업이었다.”
다시 직업 일선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일식 등 다양한 분야의 주방보조 일을 주로 했다. 음식 만드는 일을 직접 해보고 사업 아이템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리고는 다시 목표를 세운다. 이번에는 1억원이다. 어려서부터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을 해 오며 성장한 덕분에 그에게는 다른 이들에게 없는 특별함이 있다.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상대방이 무얼 좋아하고 원하는지 캐치해 내는 선구안이 발달돼 있는 것이다.

중국 마사지로 종자돈 1억원 모아 외식창업 재도전
턱 없이 가난한 어린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로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얻은 내공이다. 이런 선구안은 그가 사업을 구상하고 진행하면서 새로운 개념의 아이디어를 채택할 때 빛을 발한다. 돈가스 사업을 접고 다시 미친듯이 다양한 아르바이트 일로 바쁠 즈음, 그의 눈에 들어온 아이템 하나가 번뜩였다. 바로 중국 마사지였다. 매사에 부지런하고 성실한 그의 눈에 들어온 중국 마사지는 분명 가능성이 큰 사업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틈틈이 상권 공부를 해왔던 차 대표는 우선 한 지역 내에서 모든 업무를 해결하는 구조인 항아리 상권에 주목해 찾아낸 곳이 인천 논현동이었다.
중국 마사지는 이 지역에서는 그가 처음이었다. 사람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데 탁월한 그의 안목은 나이가 들면서 서서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업소를 차리자마자 사람들로 미어터졌다. 이곳에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경험한 모든 노하우를 쏟아 부었다. 배달에서 쌓은 신속 정확, 서빙에서 얻은 친절서비스, 대리운전에서 얻은 다양한 상식들, 주유소에서의 손님 끌기 미소작전 등이 총망라됐다. 초대박이었다. 투자금 1억의 4~5배의 이득을 보고 3년 만에 정리하고 나오게 된다.
이 사업을 통해 외식업을 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했고 10년 동안 기다려 준 아내와도 결혼을 하게 된다. 고생 끝에 이제 조금 삶에 온기가 찾아온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는 외식으로 성공하기 위한 여정을 멈추지 않는다. 중국 마사지를 정리하고 남은 여유자금으로 창업을 하기 위해 아이템을 찾아다녔다. 어느 날 친구의 손에 이끌려 간 족발집에서 예기치 않은 기운을 느낀다. 평소 입에 대지도 않던 족발을 먹었는데 따뜻한 고기들에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아니 맛이 괜찮다고 해야 할 정도였다. ‘아! 이게 웬일이지. 내가 거부를 안 하다니…….’ 집에 돌아오는 길 내내 족발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3년 전, 당시에는 구제역이 발생해 돼지고기가 거의 팔리지 않을 시기였다.
“지금 당장은 구제역으로 팔리지 않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마니아들은 분명 다시 찾을 것이다.” 그의 예단은 정확했다. 서울 등 도심에서는 따뜻한 ‘온족’이 일찍 알려졌지만 도심을 멀리 벗어난 곳에서는 족발 그 자체를 차갑게 해서 먹는 게 상식처럼 여겨지던 시기였다. 그는 일부러 바다가 지척인 인천의 끝자락 용현동에 가게를 얻었다. 시내와 떨어져 있는 이곳에서 승부를 걸어야겠다는 판단이 선 탓이다. 그의 사물을 읽어 내는 힘이 또 다시 발동한 것일까. 처음에는 족발을 차갑게 해서 달라고 호통을 치던 고객들이 이제는 따뜻하지 않으면 가져가지 않을 정도로 인식이 180도 바뀌게 됐다.
 

▲ 차경철 대표 ⓒ 사진 박세웅 기자

장모님의 고마움을 ‘장모족발’로 보답, 대박집으로 유명세
평소 장모님을 어머님으로 모시며, 고마움을 많이 느꼈던 그는 보답차원에서 상호를 <장모족발>로 정한다. 많은 이들로부터 작명을 잘했다는 칭찬을 들을 정도로 일품 상호였다. 그리고 책에서 공부한 마케팅을 차용하기로 하고 매일 한정된 양만 팔았다. 처음에는 족발 20개가 들어있는 한 판만 팔았다. 다 팔리면 미련 없이 문을 닫았다. 점차 입소문이 돌았다. “족발이 맛있어서 일찍 다 팔려 문을 일찍 닫는다”, “이른 시간에 그나마 먹을 수 있다”, “미리 주문하지 않으면 1시간 이상씩 기다려야 한다” 등의 전설 같은 얘기들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가족들로부터 야단을 들어야 할 정도로 이해가 쉽지 않은 마케팅전략이었다. 49.5㎡(15평) 규모의 매장에 투자비 7000만원이 들어갔는데, 4~5시간만 영업을 하고 문을 닫아버리니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는 가족들에게 전후 사정을 얘기하고 자신의 굳은 신념을 확고히 내비치며 설득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판매되는 족발 수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20개에서 30개, 다시 40개에서 50개로 계속 늘어나는 것이었다. 6개월쯤 흐르자 가게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서기 시작하고 그 줄이 2개, 3개로 이어질 정도로 대박집으로 거듭나게 된다.
기다리는 손님들이 너무 많아지자 본점 가게 이웃에 2호점인 분점을 오픈하게 된다. 이 지역 사람들에게 따뜻하고 부드러운 족발이 새로운 맛으로 다가선 것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똑같은 가게를 내달라고 사정하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아직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기 위한 시스템을 전혀 구축하지 않은 상태인데 막무가내였다. 주변에서는 만류하는 분위기였다. 맛집으로 대박이 났지만 가맹점을 내 줄 정도로 가게 내부가 안정적이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주위의 가게 오픈 요청은 더욱 밀려들었다.

분점 내달라 애원.....
프랜차이즈 사업으로 뒤통수 쳐

그래서 일단 전수창업 형식으로 점포를 오픈시켜주게 된다. 지금까지 모두 16개의 가게를 오픈시켰다. 그러나 이것이 대박가도에 또 하나의 뇌관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전수창업으로 오픈시켜준 일부 가게에서 <장모족발>이라는 상호로 버젓이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고 또 본점 행세를 스스럼없이 하는 업소까지 등장하는 등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법적으로 제재할 만한 마땅한 내용도 딱히 없는 터여서 그는 속병을 얻을 정도로 마음의 상처를 크게 받는다. 차 대표는 일단 마음을 정리하기로 한다.
그는 한 번 판단이 서면 신속하게 실행에 옮기는 CEO로 유명하다. 그리고는 제 2의 창업을 기획한다. 가게 인테리어와 메뉴 그리고 족발의 현대화를 기치로 내걸고 제 4세대 신개념 족발 전문점을 론칭한다. 일명 <장모족발 시크릿 레시피>가 탄생한 것이다. 현대식으로 완벽하게 재탄생한 ‘시크릿 레시피’는 맥주를 접목시킨 포차개념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족발전문점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셀프 탕 바’를 설치해 젊은 층들의 구미를 한층 당기게 구성했다.
탕 바는 짬뽕, 어묵탕, 국물떡볶이 등을 스스로 해 먹을 수 있도록 별도로 차려놓은 공간이다. 다시 말하면 안주 하나를 별도로 더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또한 약 30여종의 수입맥주를 저렴하게 판매하는 동시에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스몰비어 메뉴를 보강해 고객들의 욕구를 최대한 반영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당연히 고객들의 반응은 격렬할 정도로 폭발적이다. 매출도 2배로 껑충 뛰었다. 가맹점을 내달라는 고객들의 주문도 앞 다퉈 쇄도하고 있다.

제 4세대 신개념 족발전문점
<장모족발 시크릿 레시피> 인기 폭발적

그러나 차 대표는 이전의 전수창업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가 깊어 일단 숨고르기를 한 다음 본격적으로 프랜차이즈 사업으로 이어 나간다는 입장이다. 일단 시작하면 체계적이고 도약적이며 미래지향적인 기업의 틀을 갖춰 나갈 계획아래 전사적인 역량의 에너지를 결집시키고 있는 중이다.
“전수창업에서 파생된 문제로 그동안 마음고생을 너무 심하게 앓았다. 그래서 제 2의 창업 수준으로 <장모족발>을 완전히 리뉴얼했다. 기존 본점은 유명한 맛 집으로 계속 운영하고 프랜차이즈 사업은 현대화 시킨 <장모족발 시크릿 레시피>로 진행시켜 나갈 계획이다. 벌써부터 가맹점 문의가 이어지고 있을 정도로 반응이 폭발적이다. 아늑하고 깔끔하게 정리된 인테리어, 새로 도입한 저렴한 수입맥주, 별도의 안주인 탕 메뉴들, 업그레이드된 족발들, 스몰비어 안주 등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조건들을 모두 결집시켜 제 4세대 족발 전문점의 진수를 보여줘 가맹점주들의 만족을 최대한 끌어올릴 각오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장모족발 시크릿 레시피>를 잘 가꿔 오랜 꿈인 민간인 선교 사업가로서의 길을 가고 싶다고. 지금도 차 대표는 다양한 이웃사랑의 목표를 실천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나눔 및 봉사활동, 착한가게 기부, 장애인 복지후원 등 많은 나눔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사회에 보탬이 되는 소박한 프랜차이즈 대표가 되는 게 그의 희망이다.

글  이덕철 발행인  사진  박세웅 팀장
캐리커처  원소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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