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방차의 대중화 33세 스타CEO가 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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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방차의 대중화 33세 스타CEO가 풀다
  • 창업&프랜차이즈
  • 승인 2016.06.13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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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오가다의 <오가다> 최승윤 대표
▲ (주)오가다의 <오가다>  최승윤  대표

불가능해 보였던 한방차의 프랜차이즈화에 성공한 탁월한 전략가
한방 블렌딩 티 카페 프랜차이즈 브랜드 <오가다>를 운영하고 있는 최승윤 대표의 이력은 다른 프랜차이즈 기업들의 대표와는 사뭇 다르다. 22살 대학생 때 이미 사업자등록증을 내고 학생사업가로서의 길을 걸은 경험이 있고 일반 병사보다는 장교를 선택해 R.O.T.C를 자원하기도 했으며 졸업 후에는 26세 때 일반적인 취업보다는 창업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등 남다른 행보를 보여 왔다. 무엇보다 주목받는 부분은 아이템으로 한방차를 선택했다는 사실이고 그것도 카페가 아닌 테이크아웃으로 설정했다는 점이다. 6.6㎡(2평) 남짓한 공간에서 시작한 한방 블렌딩 티 <오가다>는 뛰어난 마케팅과 독특한 맛으로 1개월쯤 되자 1일 100만원대의 매출을 올리는 매장으로 급부상한다. 1호점 매장의 성공을 발판삼아 300미터 떨어진 종로구청 앞에다 2호점을 차리자마자 대박가게로 명성을 얻고 6개월 만에 3호점을 내는 등 파죽지세의 길을 걸어왔다. 로드숍의 로망이라 불리는 코엑스에 입점했다가 리뉴얼의 덫에 걸려 잠시 어려움도 겪었지만 한창 상승곡선에 있는 <오가다>의 매출을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모두 130여개의 가맹점들을 오픈시킨 최 대표는 작년 하반기에 제2브랜드인 <오 쉐이크>를 출시했다. 반응이 만만치 않게 나오면서 벌써 20여개의 가맹점이 오픈돼 성업 중이다. 이제 30대 초반인 그에게 많은 이들의 시선이 가는 이유다. 올해가 그에게는 중요한 해가 될 전망이다. 도약이냐, 제자리냐가 기다리고 있어서다.

가맹점 130여개, 100억대 매출의 화제의 기업
중, 고교 시절 총학생회장을 역임하며 그 당시 드물게 교환학생 신분으로 러시아 고교에 유학을 다녀오고 또 명문대에 진학하는 등 학창시절부터 스펙이 남달랐던 원주 출신의 CEO, 대학재학 당시 이미 사업자등록증을 내고 디자인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면서 한 달에 1000만원대의 실적을 올려 주위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던 재원, 사회에 진출한 26세 때 취업 대신 창업을 과감하게 선택해 하루에 100만원이 넘는 매출을 매일 경신하며 대박가게를 한 달 만에 만든 기록의 사나이, 기호음료의 황제라 불리는 커피에 맞서 불가능하다는 편견을 깨고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던 전통 한방차의 테이크아웃에 도전해 성공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파이오니아, 매년 30%의 회사성장률을 기반으로 한방 블렌딩 티 카페를 유명프랜차이즈 기업으로 발돋움시킨 탁월한 조타수, 33세의 나이에 프랜차이즈 가맹점 130여개를 오픈시키고 매출 100억원대에 안착함으로써 세간의 이목을 받고 있는 프랜차이즈업계의 기린아.

 

사업가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적은 나이인 30대 초반임에도 다양한 캐릭터와 경력으로 눈길을 사로잡는 한방 블렌딩 티 카페 프랜차이즈기업 (주)오가다의 최승윤대표(33)는 스타CEO다. 한방차로 세계적 커피기업인 <스타벅스>를 능가하겠다고 호언장담하며 26살 나이에 시장에 뛰어든 그를 놓고 누군가 “어이가 없다”고 했던가.  
그러나 그는 이 말을 비웃기라도 하는 양 지금까지 6년간에 걸쳐 매년 30%씩 사세를 성장시키며 그가 뱉은 말에 대해 응답하고 있는 중이다. 게다가 최 대표는 최근 들어 제 2브랜드인 <오 세이크>를 내놓고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쉐이크 전문점을 표방한 이 브랜드는 이미 화려한 비주얼과 중독성 강한 달콤함으로 복합쇼핑몰 등 특수상권 위주로 20개의 점포가 오픈돼 있는 등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이렇듯 열혈 청년사업가로 불리며 승승장구하고 있는 최 대표는 어떤 이유로 대학 졸업 후 26세의 나이에 취업 대신 어려운 창업을 택했으며 대중화시키기에는 불가능하다는 한방차를 프랜차이즈화 해 성공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을까. 그리고 과연 그의 패기대로 <스타벅스>를 능가할 수 있는 기업으로 <오가다>를 키워낼 수 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혜화동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마주한 최 대표는 예상대로 여유 자작한 폼으로 시선을 당긴다. 적은 나이에 사회와 일찍 마주쳐서일까.  

“너는 뭐든지 할 수 있어” 인생의 좌표가 되다
아니면 태생이 준비된 자유로움인가. 딱딱하고 경직된 무거움이 아니라 운율적이고 탄력적이며 세련감이 켜켜이 스며든 유연성이 날것으로 흐른다. 날카로운 듯 미려하고 꿰뚫는 듯 응시하며 경청하듯 다가오는 동선의 실루엣에는 즉물적 반사가 예리하게 채색돼 있다. 막힘없는 대화법과 높낮이가 고루 섞인 언어 구사력에는 사람의 안팎을 읽는 눈이 꽤 깊고 직관력의 뛰어남을 알린다. 무엇보다 그가 주도적이자 진취적인 CEO로 보인 까닭은 그의 행동과 말이 대화의 공기를 앞지르고 있어서다.   
최 대표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부모님으로부터 ‘무엇’을 하라고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 공부를 열심히 하라거나 지각을 하지 말라거나 좋은 직장에는 어떤 것들이 있으니 거기에 가야 한다거나 등 일절 그냥 맡겼다. 그래서 지각도 하곤 했다. 그러나 부모님이 그에게 365일 잊지 않고 해 준 말이 하나 있다. 아침 등교 때마다 이 말은 빼먹지 않았다. “너는 뭐든지 할 수 있어”. 무조건적인 격려였다. 이 습관은 훗날 최 대표 인생 좌표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스스로 책임을 져야했고 무엇이든 자신이 주도적으로 해야 하는, 다시 말하면 자신의 판단에 의해 결정을 하는 과정에 놓이게 됨으로써 늘 다양한 방법론을 생각하는 습관을 가지게 된다. 어릴 때부터 늘 자신이 결정하는 일들이 많아짐으로써 그는 남들과 다르게 자신감이 붙어갔다. 
“공군 비행조종사였던 아버지나 어머니 모두 우리 남매에게 무엇을 하라고 강요한 적이 없었다. 그냥 아침에 나올 때 ‘너는 뭐든지 할 수 있어’ 하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실 뿐이었다. 그 당시 기억을 떠올리면 뭔지는 모르지만 나는 뭐든지 할 수가 있을 것만 같았고 그 얘기로 용기도 나도 모르게 많이 자라곤 했다. 아침에 잠을 안 깨워서 지각을 한 적도 여러번 있을 정도였다. 주도적으로 혼자서 뭐든지 해 버릇하다보니 스스로의 자신감도 커져 갔었던 것 같다.”

대학 3학년 22살 때 ‘사업자등록증’을 내다
이런 생활양식은 그가 청소년기 총학생회장을, 군대를 사병이 아닌 R.O.T.C 장교를, 대학 졸업 후 취업이 아닌 창업을 하는 등에 크게 작용했다. 그는 고려대에 입학하고 나서 1, 2학년을 응원단 활동으로 바쁘게 보낸다. 이 서클활동은 나중에 그가 ‘다섯가지 아름다운 차’라는 뜻의 전통한방차 <오가다>라는 브랜드를 론칭 했을 때 큰 역할을 하게 된다. 3학년에 올라가서 그는 군대문제에 봉착하자 자신이 좀 더 주도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쪽을 찾아  R.O.T.C에 들어간다. 
일반 병사보다는 좀 더 자신 지휘아래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대학 졸업 후의 창업을 염두에 두고 3학년 당시 사업자등록증을 낸다. 그의 나이 22살 때였다. 학교 다니면서 사업자등록증을 낸 사람은 그 외에 아무도 없을 정도로 친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회사 이름은 <라임커뮤니케이션>이었다. 영세하고 작은 여행사들을 상대로 디자인 통합컨설팅을 해 주는 회사였다. 
삼촌이 종로에서 여행사를 하는 관계로 그는 종로주변의 여행사들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직원이 2~3명씩 밖에 안 되는 회사들의 심볼, C.I 등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시키는 게 사업의 목표였다. 큰 자본이 없었던 학생신분이어서 홀홀 단신 영업을 다니면서 일감을 따오면 디자인 회사에 인턴으로 근무하는 미대 출신 친구들이 마무리하는 형식이었다. 한 달에 30만원하는 조그만 사무실을 얻어 영업했다. 30~40개의 작은 여행사가 몰려있는 건물 2~3개만 돌아 하루에 1건만 건져도 괜찮은 아이템이었다. 그러나 영업이 어디 쉬운가. 
혼자서 약속도 없이 무대포로 막 찾아다니다가 문전박대 당하고 나면 맥이 풀리고 다리의 힘이 쭉 빠지곤 했다. R.O.T.C 생활을 겸하면서 영업을 다닌 관계로 거의 까까머리에 아버지 양복을 걸치고 다녀 조금은 별스런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 번 마음을 먹으면 불도저처럼 자신의 계획을 초지일관 밀고 나가는 추진력이 대단한 젊은이 아닌가. 초창기에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진땀이 흐르기도 했다. 그렇게 다니다가도 운 좋게 사람을 잘 만나면 인연이 돼서 가지치기를 해 고객이 여러 회사로 옮겨 붙기도 했다. 

학생 사업가 1000만원대 매출로 친구들 부러움 ‘한 몸’
어떤 한 회사는 30페이지짜리 사업계획서 브리핑 후 처음엔 30만원짜리 회사 로고를 주문하더니 너무 마음에 들었는지 차즘차즘 일을 맡겨 나중에는 3000만원까지 매출을 올려준 곳도 있었다. 이렇게 들어온 수입은 미대 친구들하고 비슷한 규모로 배분했다. 자본이 없는 관계로 아이디어와 노동집약적인 사업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대학생 사장님(?)생활을 군대 가기 전인 4학년 때까지 유지하며 나름대로 짭짤한 수입과 장래 사업의 청사진을 그려보곤 했다. 
공부와 사업을 병행하면서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 그는 자신감이 더 붙기까지 했다. 군대에서조차 휴가를 나오면 가게 입지를 보러 여러 장소를 물색해 다니기도 하고 비숫한 또래의 젊은 소대원들과 창업에 대한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사실 진로에 대해 고민이 많았던 과정이었다. 전역하는 날 끝까지도 정리가 안됐었으니까. 그런데 고민을 그냥 앉아서 하거나 책보고 할 게 아니라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하면서 어떤 것을 하면 괜찮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대학교 다닐 때 노동집약적인 사업을 한 번 시작해 본 것이고 그 외에도 건설현장의 막노동 등 경험을 쌓기 위해 집에 있는 날들이 많지 않았었던 것 같다.”
취업과 창업사이에서 갈등을 겪다 결국 창업 쪽으로 방향을 튼다. 대기업과 중견기업의 입사시험에 합격했지만 언젠가는 창업을 하리라 마음먹은 상태라 일찍 시작하는 걸로 마음을 굳혔다. 나중에 결혼하고 아이 낳고 애들 학교 다니면 창업하는 게 더 어려워 질 것이란 판단 때문이었다. 아이템은 한방차 테이트아웃 전문점이다. 그동안 사업을 구상하면서 다양한 아이템과 시장성을 조사해 와 아이디어는 사실 상당히 많았다. 그러나 최종 선택된 아이템은 한방차 테이크아웃 전문점으로 정했다. 
이 아이템은 그가 대학재학 중에 운영했던 디자인 통합 컨설팅 회사에서 영업을 다녔던 종각역 인근의 직장인 점심 풍경을 보고 착안한 것이다. 최 대표는 점심식사 후 거의 모든 직장인들이 손에 커피가 든 컵을 들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대학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사회 직장인들한테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었다. 저 컵 속에 커피가 아닌 몸에 좋은 우리의 차를 넣고 마시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이 때 하게 된다. 그가 이걸 지금 현실에 옮기려고 하는 것이다. 

취업과 창업 고민하다 26세때 한방차 ‘오가다’ 론칭
그리고 한방차를 대중들에게 알리는 시기도 그가 전역하던 2009년 여름이 적격이라고 판단했다. 더 이상 뒤로 늦추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는 디자인회사를 운영하면서 영업하던 서울시청 근처 6.6㎡(2평) 남짓한 작은 가게를 보증금 2000만원, 권리금 3000만원, 월세 70만원으로 계약을 맺고 창업 일정을 잡았다. 자금은 모두 1억원이 들었다. R.O.T.C하면서 모은 돈 3000만원과 디자인회사 운영으로 번 돈 2000만원, 그리고 부모님에게 사업계획서 브리핑 후 받은 돈 5000만원이었다. 문제는 인력이었다. 
아직 프랜차이즈 사업으로까지 영역이 확대되지 않은 단일 점포였지만 론칭에 따른 인력은 태부족이었다. 그가 1인 3역을 하면서 버텼다. 한방차 메뉴는 어머니와 친구 분들이신 한의사와 약재협회장 등의 도움을 십시일반으로 받아 개발해 구성했다. 회사의 브랜드 네이밍 등 디자인은 예전의 친구들이 달려들어 해결해 주었다. 최 대표의 어머니는 평소에도 차와 관련된 책을 많이 보고 가정에서도 그냥 냉수를 내 놓는 법이 없을 정도로 차를 즐겨 만들고 마시는 등 항시 다루어 와 그가 한방차를 떠올리는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건강에 좋은 한방차를 제공하면 많은 고객들에게도 좋고 또 고마워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똑같은 사업을 해도 고객들이 돈을 지불하면서 감사해하는 마음을 갖게 만드는 것이 그의 소망이기 때문이었다. 
“대학 때 디자인 사업 당시 30만원으로 시작해 3000만원까지 일감을 맡겼던 여행사 사장 한 분은 내가 만들어준 디자인으로 수입이 늘어나자 나한테 고맙다고 인사까지 하면서 일감을 추가로 계속 준 기억이 늘 잊혀 지지 않는다. 나는 납품가 이상을 받고 또 감사하다는 특별한 말까지 듣고 나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영업은 찾아가 빌면서 하는 것으로만 알던 나는 어린 나이에 큰 깨달음을 하나 얻은 것이었다. 훗날 창업을 해도 사람들이 고마워하는 의미 있는 사업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한 달만에 1일 100만원대 매출......대박가게 입소문 
드디어 군대 전역하고 1개월 후인 7월 중순 ‘오방색’ ‘음양오행’ ‘오장육부’ 등 다양한 스토리가 장착된 5가지 아름다운 차란 뜻의 <오가다>는 그렇게 문을 열었다. 직영 1호점이었다. 입구에는 ‘스타벅스를 능가 하겠습니다’라는 글귀를 붙여놓았다. 친구들과 지인들 그리고 친인척 등을 모두 초대한 가운데 성대하게 오픈식을 거행했다. 
기대감으로 한 창 들떠 있는 가게 분위기와는 다르게 일반 사람들은 가게에 발길을 들여놓지 않는 게 아닌가. 참패였다. 지인들이 팔아 준 것 외에는 판매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충격이자 쇼크였다. 일과가 다 끝나고 친구들과 직원들이 둘러앉아 회의를 열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회의에서 세 가지 안이 도출됐다. 일단 오픈 홍보를 위해 가게 앞에서 시선을 끌기 위해 춤을 추기로 한 것이다. 두 번째는 오는 손님들을 반드시 기억하자였다. 그러기 위해서 인상착의, 전화번호, 기호품 등을 일일이 체크해 장부에 기재하기로 한 것이다. 
세 번째는 <오가다>를 일방적으로 알아달라고 하지 말고 알리는 쪽으로 노력키로 했다. 다음날부터 작전개시에 들어갔고 서서히 한잔 두잔 판매가 늘어나더니 하루에 10만원, 20만원하던 메뉴들이 한 달이 다 돼 가니 100만원대를 찍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맛보지 못했던 새로운 맛의 한방차에 기뻐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놀라운 일이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많이 팔리는 날은 150만원대를 넘나들더니 일대에서는 금방 대박가게로 입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최 대표는 당초 1년 동안 1호점만 운영해 보고 다음 수순을 생각해 볼 계획이었으나 너무 일찍 대박가게로 떠오르면서 계획을 급 수정한다. 그의 현장을 읽어내는 탁월한 안목은 빠른 두뇌회전 덕이다. 매사를 주도적으로 스스로 처리하는 방식에 익숙하고 신속 정확함까지 갖춘 그가 아닌가. 1호점과 바로 200~300미터 거리 수준인 종로구청 인근의 재개발지역에 가게 터가 나오면서 2호점을 두말없이 결정한다. 자금사정이 빡빡한 상태였지만 그의 안목에는 대박의 기운이 움트고 있었다. 

오픈하는 점포마다 대박나자 합작 등 각종 제의 들어와
1호점을 오픈한 지 3개월만의 일이다. 권리금이 없는 관계로 상대적으로 투자비가 적었던 19.8㎡(6평)가게를 두고 다른 이들이 머뭇거릴 때 그가 바로 낚아채면서 한 달이 가기도 전에 대박가게로 명성을 얻게 된다. 물론 1호점에서 올린 매출을 모두 끌어 모아 만든 2호점의 결과여서 더 감격스러웠다. 최 대표가 꼼꼼히 수첩에 기재해 놓은 단골 고객들은 모두 500여명이다. 이 중 30여명이 3개월만에 2호점에 오픈에 대해 축하메시지를 보낼 정도로 관리도 철저했다. 주위에서는 곧바로 아우성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한 외식 기업에서는 브랜드를 통째로 인수할 의향이 있다는 뜻을 전달해 오는가 하면 어떤 예비창업자는 프랜차이즈화 해서 가맹점을 내 달라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또 다른 이들은 투자를 할 터이니 법인을 만들어 함께 운영해 키워 보자는 제안을 해 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사업초창기부터 회사업무와 관련해 재무적인 것을 비롯, 회사 전반에 대해 조언을 구하고 있던 학교 동문이자 회계법인에 근무하고 있던 선배 회계사에게 이런 내용을 알리고 의견을 청했다. 
선배는 아예 함께 일하자며 직접 투자의사를 밝혀 와 일정 지분을 양도받고 현재 부대표로 회사 운영에 참여하고 있다. 이로 인해 그해 12월 북창동에 42.9㎡(13평)짜리 3호점 오픈과 함께 물류공장을 마련하는 한편 사무실도 확장해 본격적으로 전열을 정비해 나갔다. 그러나 2호점 오픈 3개월만에 오픈한 3호점도 대박점포로 소문이 나자 다시 가맹점을 내달라는 이들의 성화가 계속되기 시작한다. “지금은 안된다”고 버텼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부회의를 열고 갑론을박을 거쳐 결정을 내렸다. 4, 5, 6,7호점이 일사천리로 오픈돼 성업리에 장사를 하게 되고 매년 20개 내외의 점포가 오픈돼 나갔다. 매출도 프랜차이즈 첫 해인 2010년도에 10억원을 비롯, 매년 증가해 24억, 36억, 52억, 72억 그리고 작년에 100억원을 돌파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일반 프랜차이즈 기업과 달리 계단식의 안정된 성장 구조를 이뤄왔다는 점이 <오가다>만의 최대 장점이다. 

매년 매출 30%씩 안정적으로 성장해, 메뉴개발에 ‘심혈’
입지가 탄탄하다는 방증이다. 이같은 매출 증가는 최 대표가 심혈을 기울여 만드는 메뉴들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가다>는 현재 제주영농조합, 삼영식품원료공업 등 중소기업 식품업체들과 협력사업을 통해 양질의 국산 원재료를 사용하고 <오가다> 워터를 기본으로 한 약 30여가지 메뉴를 인기리에 판매하고 있다. 특히 aT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의 지원하에 삼영식품원료공업과 함께 한방약재를 농축하여 개발한 5가지의 기능성 워터로 블렌딩 티, 주스, 스무디 등을 만들어 호평을 받고 있는 중이다. 
이와 함께 건강하면서도 맛있는 차 문화를 소비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과일, 꽃잎 허브 등을 사용한 티백과 우리 농산물을 이용한 과일청 등 다양한 원재료를 블렌딩 해 맛과 색, 건강까지 잡는 음료를 개발해 냈다. 또 모과유자, 매실, 오미자 등 한국적인 재료와 히비스커스, 루이보스, 로즈힐 등 허브를 함께 블렌딩한 티는 다양한 맛과 탁월한 풍미를 간직해 마니아층까지 생길 정도다. 
최근에는 기존의 한방차를 모티브로 한 오리지널 블렌딩 티 3종인 십전대보, 배도라지생강, 아사이베리 등을 출시, 고객들의 호응도를 이끌어 내고 있다. 이같은 블렌딩 티는 매년 40%씩 판매율이 증가하고 있다. 이처럼 최 대표는 고객들의 높은 차 문화 욕구에 발맞추어 전문 R&D팀을 구성해 매 분기마다 신선하면서도 건강한 메뉴개발에 힘쓰고 있다.  
현재까지 모두 131개의 매장을 오픈시킨 <오가다>는 올해 가맹점 오픈 계획을 총 60개 정도로 설정해 놓았는데 비수기인 1분기 동안에 벌써 15개 내외의 가맹점이 오픈돼 상향조정에 들어갔다. 최 대표는 작년 5월에 제 2브랜드인 쉐이크 전문점인 <오 쉐이크>를 내 놓고 담금질을 하고 있는 중이다. 

제2브랜드 <오 쉐이크> 벌써 관심......20여개 성황리 영업
또 하나의 신화창조가 가능할 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현재 20개 가까운 가맹점이 오픈돼 있는 <오 쉐이크>는 회사 전 직원의 아이디어 회의를 거쳐 탄생한 특별한 브랜드여서 최 대표의 기대감도 상당하다. 해외 진출에도 공을 들이고 있는데 현재 일본에 3개의 매장을 오픈중에 있으며 대만, 사우디아라비아 기업들과 마스터프랜차이즈 계약을 맺은 상태며 미국 LA에도 매장 오픈을 염두에 두고 의사를 타진중이다. 
뛰어난 안목과 타오를 것 같은 열정 그리고 강력한 추진력으로 국내 최초로 한방차 프랜차이즈 사업을 약관의 나이인 26세에 시작해 8년만에 성공으로 귀결시킨 최 대표는 올해를 또 한 번의 도약기로 삼고 있다. 매년 30%씩 차근차근 성공의 탑을 쌓아 온 이력을 지렛대 삼아 점프할 준비가 다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눈길을 뗄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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