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려고 발버둥치지 마라 품격 있는 삶을 추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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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려고 발버둥치지 마라 품격 있는 삶을 추구하라
  • 최윤영 기자
  • 승인 2015.08.07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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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기원』 서은국 지음

Book Review


『행복의 기원』
서은국 지음

행복하려고 발버둥치지 마라
품격 있는 삶을 추구하라

 

서점에 가면 행복을 다룬 수많은 책이 있다. 다양한 논리가 있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욕망을 다스리라는 설명이 주를 이룬다. 대표적인 예가 디오게네스의 일화다. 알렉산더 대왕이 가르침을 달라고 찾아갔더니 햇빛을 가리지 말아달라고 답했다는 이야기다. 동양에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 공자는 나물밥을 먹고 나무 그늘에 팔베개를 하고 누우면 그것이 행복이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그 말에 쉽게 수긍하지 않는다. 어째서 현대인들은 성인들의 좋은 말씀을 듣지 않고 경쟁에 지쳐가는 것일까.

 

행복은 순간의 감정이다
디오게네스과 그 일파의 삶은 냉소적(cynical)이라는 영어 표현의 어원이 됐다. 한자로는 견유학파(犬儒學派)라고 하는 이들은 개처럼 유유자적하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주장했다. 그리스어로 cynic은 ‘개’를 가리킨다.
종교 역시 욕망을 절제하고 행복을 찾으라는 요구를 한다. 역사가들은 고대국가의 성립요건으로 법률과 더불어 종교의 도입을 꼽는다. 불교는 속세에서 착하게 살아야 내세에 지배층으로 태어날 수 있다고 했다. 유교는 신하는 신하의 일을, 자식은 자식 된 도리를 잘 하라고 주문했다.
현대인은 이제 이런 논리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산업이 고도화된 현대 사회는 기본적인 욕망을 충족하기가 어렵다. 주거, 이동수단, 결혼과 자녀 양육 등에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높아졌기 때문이다. 행복이 삶의 목적이라고 하던데, 행복과 나의 삶은 너무나 거리가 있는 것 같다.
『행복의 기원』은 기존 행복론과 궤를 달리한다. 어떻게 행복할까가 아니라, 행복이 삶의 목적이라는 생각을 버리라고 주문한다. 행복은 뇌가 느끼는 감정 중에 하나일 뿐, 생각을 고쳐먹는다고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논리다.
‘작은 사치’라는 마케팅 용어가 있다. 스스로에게 어떤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하는 보상을 지급해 소소한 행복감을 얻는 소비자 행동이다. 우리는 먹음직스러운 사과를 보고 행복감을 느낀다. 아직 사과를 먹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분명히 사과 자체는 행복이 아니다. 서은국 교수는 이를 진화론적으로 해석한다. 사람은 사과를 먹어야 생존율이 높아진다. 그래서 사과를 발견했을 때 뇌에서 쾌감을 느낀다.

행복은 자연선택의 결과다
불편하지만 자연선택 이론은 설득력이 있다. 사람의 행동은 많은 부분이 비이성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이뤄진다. 예를 들면 레몬 향을 맡으면 청결에 신경 쓰게 된다는 실험 결과가 있다. 많은 주방세제가 레몬향을 내기 때문이다. 주방세제에서 레몬향을 맡은 경험이, 실제 레몬향을 맡았을 때 설거지는 했나 하고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의 비합리적인 행동의 많은 부분은 오랜 기간 자연에 적응하면서 얻어진 유전적 요소다. 인간의 문명생활은 전체 인류의 시간을 1년으로 했을 때 2시간에 불과하다. 현대 사회에서는 자동차를 피하는 것이 합리적이지만, 실제로는 위기가 닥치면 몸이 굳어버린다. 야생에서 포식자가 나타나면 가만히 있어야 들키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현대인이 칼로리 섭취를 줄이고 싶지만 식욕을 절제하기 어렵다. 야생에서 진화한 인간은 먹을 것이 있으면 쾌감을 느끼는 탓이다.
인간의 행복은 다른 동물이 느끼는 쾌감과 다르지 않다. 과식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는 것이 행복인가. 아니면 절제하고 안정감을 가져가는 것이 행복인가. 그리스 세계에서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는 이런 주제로 다퉜다. 미안하지만 식욕과 성욕 등 사람의 욕구는 철학적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종족이 번성하려면 생명을 유지하고 후손을 남겨야 한다. 그러려면 음식을 먹고 섹스를 할 때 행복감을 느껴야 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음식을 먹고 섹스를 할 때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이 생존했다.
왜 인간의 뇌는 쾌감과 불쾌감을 느끼는가. 다치면 고통을 느껴야 생존할 수 있다. 진통제는 고통을 느끼는 부분을 자극한다. 다리의 상처는 그대로지만 불쾌감이 줄어든다. 항우울제는 쾌감을 느끼는 부분을 자극한다. 생활의 다른 변화가 없어도 항우울제만으로 기분이 좋아질 수 있다.
사람의 행복, 아니 쾌감은 일시적이다. 그래야 사냥을 지속하고 새 짝짓기 상대를 찾으며, 폭식을 하지 않게 된다. 가임기가 되면 딸은 아버지에 대한 호감도가 떨어진다. 실험 결과 실제로 가임기에 아버지와의 전화 통화 빈도가 낮아졌다. 친족 번식을 억제하는 본능이다. 이 본능 때문에 성장기에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낸 남녀는 이성적 호감을 잃는다.

군집본능을 버려라
사람은 홀로 떨어지면 불쾌감이 온다. 야생에서 군집을 이루면 생존율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과 관계를 맺는 이유다. 본능에 집착하는 사회, 성숙하지 않은 사회는 분별없는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고 남을 심하게 의식한다. 그래서 남을 만나는 양은 넘치는 한국 사회지만 만남에 품격이 없다. 서로 상처를 받고 에너지를 얻기보다는 빼앗기고 온다. 결혼하는 연예인은 열심히 살터이니 지켜봐달라고 한다. 운동선수는 메달을 따지 못해 국민들께 죄송하다고 한다.
많은 행복론이 돈은 행복의 목적이 아니라고 설파한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서은국 교수는 돈을 이렇게 설명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사회작동의 기제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의 뇌는 아직 돈에 반응하지 않는다. 그 정도로 돈의 역사가 길지 않다. 돈을 비롯해 사회적으로 인식되는 행복의 조건을 많이 만족하는 것과 실제 행복도는 관련이 없다. 행복은 강도가 중요하지 않고 빈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회적 조건을 만족했더라도 거기서 나오는 쾌감은 곧 사라진다. 그래서 더 어려운 사회적 조건을 향해 노력하는 일이 되풀이된다.
통계를 보면 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는 행복도가 낮다. 한국도 여기에 포함된다. 왜 한국 사람은 돈이 인생의 목적일까. 경제적 부가 아닌 사회적 부가 충만해야 행복한데 한국 사람은 서로 같이 있어도 외롭다. 품격 있는 삶과 행복한 삶은 다르다. 남에게 갑질해서 만족감을 느끼려 하지 말고 자신 인생의 갑이 되어라. 삶의 선택을 개미가 아닌 베짱이에 두어도 된다. 불행하다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은 틀렸다. 행복은 관념이 아니다. 행복은 경험이다. 행복을 내려놓고 어떻게 가치 있는 삶, 품격 있는 삶을 살지 고민할 때다.

 

 

Book Review

『오랑캐 홍타이지 천하를 얻다』
장한식 지음 

하늘은 명분을 원하지 않는다
품격을 갖춘 지도자를 원한다

 

홍타이지는 조선에 삼전도의 굴욕을 안겨준, 창업주를 능가한 2세 경영을 보여준 불세출의 군주다. 우리를 짓밟은 정복자인 만큼 심도 있게 조망한 평전이 있어야 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조선시대는 젖혀두고서라도, 현대에서조차 국내 저작은커녕 국외 저작물조차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오랑캐 홍타이지 천하를 얻다』는 비록 전문 학술서는 아니지만 홍타이지의 품격을 소개한 의미 있는 책이다.


정서적 트라우마 홍타이지
이웃 대국이 다시 굴기(崛起)하는 오늘날 홍타이지 연구는 반드시 필요하다. 홍타이지가 적은 인구로 조선을 굴복시킨 원동력은 군사력도 있지만 세계관의 차이가 컸기 때문이다. 조선의 지배층은 스스로를 순이(順夷), 즉 착한 오랑캐로 자처했다. 만주족은 역이(逆吏)라고 나쁜 오랑캐로 취급했다. 청에 굴복하고 명이 망한 다음에는, 척화파들이 앞장서 우리가 ‘소중화’라는 정신승리를 보여주기도 했다.
홍타이지는 하늘이 도우면 필부도 천자가 되고, 하늘이 재앙을 내리면 천자도 이름 없는 사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조선을 비롯한 동북아 역사와 정세에 밝았다.
조선에 보내는 국서에 “요동은 본래 너네 민족의 국토였다. 명이 차지하고 있는데도 원수인 줄을 모르고 신하가 되어 복종하고 있구나. 진실로 기자조선(한족이 지배층이었다고 알려진 후기 고조선 체제)의 자손이라 노예근성이 남아있나 보다. 이제 내가 왔는데 너의 부모라는 명이 어떻게 구원하는지 보고 싶다. 그렇지 않다면 너는 무고한 백성을 물과 불 속으로 몰아넣은 셈이니 현재와 미래의 민중이 어찌 너를 탓하지 않으랴?”라고 적어 패권은 달라질 수 있음을 강조했다.
홍타이지는 “짐은 힘의 논리로 남을 침범하지 않는다. 우리 군대가 우랑카이(여진족의 일파)를 쳤을 때 너희가 우리를 공격했다. 우리가 요동을 점령하자 너희는 우리 백성(도망한 한족 포로)을 명에 보냈다. 명의 장수 공유덕과 경중명이 우리에게 귀순해 내가 맞으러 갔을 때 너희가 총을 쏘며 가로막았다. 짐이 아우로 대했는데도 너희는 스스로 원수를 만들었다.”
“너희는 우리를 정벌하겠다고 유시문을 내려놓고 왜 나와서 싸우지 않는가. 너희는 요, 금, 원에 모두 신하를 자처하고 공물을 바쳤다. 너희가 남을 섬겨 평안을 보전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나. 산성으로 도망해 천년을 산들 무슨 의미가 있나. 정묘년의 치욕을 씻는다면서 왜 부녀자처럼 울타리 안에 움츠리고 있는가”라며 조선의 현실인식을 비판했다.
당시 동북아시아는 이미 정세변화의 물결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때는 북방민족이 자신의 땅에서 크게 번성한, 중세 온난기가 끝나고 소빙하기가 왔을 때다. 온난기에 숫자가 늘어난 북방민족이 추워진 땅에서 자족하기 어려워졌고 남쪽으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홍타이지의 주된 관심사는 중원이였고 한반도가 아니었다. 그런데 중원을 공략하는데 있어서 조선은 큰 골칫거리였다. 만약 조선을 고분고분하게 만들 수 있다면 힘들여 정벌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겼다.
문제는 조선의 태도였다. 북방이 추워지면서 유목민족에게 교역의 중요성은 날로 커지고 있었다. 교역이 되지 않으면 약탈 말고는 답이 없었다. 그런데 조선의 김상헌 등 척화신들은 오랑캐에게 중국산 물품을 넘겨주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며 교역을 반대했다. 그렇게 전쟁은 시작됐다.

동북아 질서의 재편
홍타이지는 뛰어난 전략가였다. 명의 수도 북경을 사수하는 산해관을 뚫기 어렵자 몽골 주변의 만리장성을 넘어가는 대장정을 감행했다. 이른바 ‘기사전역’이 벌어졌고 수도 북경까지 밀어닥친 청군을 본 명 조정은 경악했다. 홍타이지는 무리해서 명을 멸망시키지 않고 약탈만 하고 돌아갔다. 하북성은 물론이고 산동성까지 약탈이 이뤄지면서 명 왕조는 실질적인 수명을 다했다.
철옹성이던 산해관은 결국 안에서 문이 열렸다. 외곽을 때려 종심을 허무는 전략 외에, 한족끼리 분열하게 만드는 ‘이한제한’의 전략이 통했다. 오랑캐로 오랑캐를 막는 ‘이이제이’를 반대로 적용한 전략이다. 이자성의 농민 반란군이 북경과 산해관을 차지했을 때, 원숭환 같은 명의 용장들은 역적으로 몰려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남은 명 장수들도 앞다퉈 청에 투항한 상태였다.
전투에 있어서도 홍타이지는 공성전의 시대를 넘어 참호전의 시작을 알렸다. 만주족 하면 기마전술을 떠올리기 쉽지만, 당시는 ‘홍이포’라고 사정거리 1.2㎞의 위력적인 대포가 서양에서 들어온 시기였다. 홍타이지는 홍이포 사정거리 밖에 참호를 파고 둘레는 담을 쌓도록 했다. 그리고 대포 기술자를 우대해 홍이포를 손에 넣는데 성공한다.
현대의 핵무기 같은 존재였던 홍이포는 전쟁의 양상을 바꿨다. 병자호란 때도 조선 조정은 남한산성 안으로 들어오는 포격에 속수무책이었다. 홍타이지 사후 청 왕조는 장자상속이 아닌 적자상속으로 대대로 명군을 배출했다. 인구와 산업생산이 안정적으로 늘어났고 강역은 히말라야부터 연해주까지 넓어졌다.

홍타이지의 품격경영
홍타이지는 북경이 함락되기 7달 전에 급사했지만 수도 이전 등 웅대한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음은 그의 통치철학을 요약한 것이다.
“만주족과 한인을 범인 처벌이나 공무 부담에서 차별하지 말라. 직물업이 열악하니까 세금을 면제해 육성하라. 유교적 의례에 밝은 한인을 국정 중심에 앉혀 장점을 받아들이자. 이제 같은 집안의 홀로 된 부녀를 아내로 취하지 말라. 예의가 아니다. 그렇지만 만주어를 버리지 말라. 국어를 버리고 타국의 말을 쓴 나라는 영속하지 못했다. 금나라의 실패를 반복되면 안 된다. 그리고 헐렁한 중국식 복식을 자제하라. 한족의 풍습이라서가 아니라 만주족의 치파오가 실용적이기 때문이다. 라마불교를 도입해라. 만주 몽골 티벳이 함께 하도록 정서적 공감대를 만들자.”
“전사들은 윤회사상이 있는 라마불교를 받아들이고 죽음에 대한 공포를 달래라. 전투는 취업,  약탈은 봉급을 대신하는 시스템으로 지속가능한 전쟁을 해라. 밧줄을 목에 던져 잡아가는 몽골 방식을 버리고 점령지에서 군정(軍政)으로 포로를 선별하라. 약탈하더라도 옷은 빼앗지 말고 부녀를 겁탈하지 말라. 포로는 농사를 짓게 하고 평민 전환의 기회를 준다. 본국 가족이 돈을 보내오면 교환해 줘라. 조선에서는 인명을 함부로 살상하지 말고, 지역의 무덤을 부수지 말라. 항복한 자는 죽이지 말고 변발을 시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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