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만 대표
Profile
나만의 색깔과 정성이 경쟁력
20여년의 외식 및 프랜차이즈 내공을 갈고 닦아 5막 6장의 마음으로 새로운 인생, 새로운 창업에 도전해 한결같은 맛으로 고객들로부터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 <노포식당>. 그 배경에는 정성과 열정을 다해 브랜드를 만들어 오고 있는 권순만 대표가 있다. 그의 오랜 내공은 <노포식당> 로고에서부터 점포 익스테리어는 물론 인테리어, 메뉴, 운영마인드, 직원들의 유니폼에 이르기까지 어디 하나 허투루 만들어 낸 것이 없다. 특히 갈수록 어려움에 봉착한 외식업계에 ‘밥집은 낮, 술집은 밤’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벗어나 식사와 주류뿐만 아니라 포장과 배달까지 다양한 매출분포도를 가져갈 수 있는 브랜드 경쟁력으로 예비창업인들의 마음을 사고 있다.
백 가지 재주를 가진 백수(?)
프랜차이즈 업계에 몸담아오면서 오랜만에 조우한 권순만 대표는 뭔가 좀 달라 보였다. 오랫동안 프랜차이즈 기업에서 직원과 임원 모드로 브랜드를 키워오던 그에게서 이제는 프랜차이즈 브랜드를 새롭게 론칭하고 성장시키는 CEO로서의 면모가 배어 나와서였으리라. 권순만 대표의 외식프랜차이즈에 대한 내공만큼, 자신의 브랜드 론칭에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물론, 과거에 몇 번의 창업의 시련도 겪은 터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제 그는 비로소 비장의 검을 빼 들고 ‘한 끼에 정성을 오래도록 담고자’하는 프랜차이즈 브랜드 <노포식당>을 만들고 이에 대한 각별한 정성을 쏟아붓고 있다.
권 대표의 프랜차이즈의 다양한 필모그래피 못지않게 그의 인생 역시 드라마 몇 부작은 나올 만한 굴곡지면서도 매우 거친 삶을 보여준다. 만만찮은 가정환경 속에서 생활고를 겪으며, 제대로 된 부모님의 보살핌이나 사랑을 받고 자란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아버지의 습관성 알콜로 인해 툭하면 호된 매질을 당해야 했던 어린시절, 어머니 역시 심한 고초 속에서 살아야 했고, 결국 집을 나가버리고 형제들은 친척집을 전전하기 일쑤였다.
다행히 어머니는 중학생이 되어서야 다시 함께 살 수 있었고, 돼지갈비집인 ‘실비집’을 운영하셨던 어머니의 손맛은 권 대표의 맛에 대한 첫 기억이자, 음식에 대한 정립을 세워준 기준이 된다. 뒤늦게나마 어머니 그늘에서 생활하지만, 이미 비행청소년이라는 꼬리표를 떼기에 그는 너무 높이 비상하고 있었다. 걸핏하면 학교에 가지 않았고 친구들과 싸움박질에 가출도 밥 먹듯 하던 날들이 지속됐다. 청년기엔 자주 들렀던 음악다방 DJ박스 안의 모습이 멋있어 DJ 생활도 10년 가까이 하게 된다.
이태원부터 시작해 충청도와 대전 등을 오가며 음악다방이나 나이트클럽 등을 전전하며 그렇게 즐겼다. 어느덧 그의 나이 30세. 오랜 야간업소 생활로 체력은 소진되고, 변변한 회사에 신입사원으로 들어가기엔 나이가 많아 공사현장, 택시운전, 부동산 중개소 등 다양한 일을 하며 또 다른 세상을 읽는 시간을 보낸다. 남이 보기엔 별 볼일 없는 시간이지만, 외식업을 하면서 이런 직업은 알게 모르게 자신에게 큰 자양분이 되었음을 확인하곤 한다.
공사현장을 통해 설계도 보는 눈이 생겼고, 택시나 부동산을 통해서는 거리 상권이나 먹거리에 대한 감을 익힐 수 있었고, 오랜 DJ생활은 고객의 성향이나 트렌드, 흐름을 읽는 데 남다른 감각을 키웠다. 뚜렷한 직업 없이 방황하던 그의 화려한 삶의 스팩트럼은 ‘나 자신도 모르게 진정한 백수로 만들어 주었다’고 말한다. 권순만 대표가 말하는 ‘백수’란 백 가지 재주를 가진 사람으로 읽힌다. 뚜렷한 직업 없이 방황하던 다양한 삶의 체험이 결국, 자신도 모르게 못하는 것 없는 진정한 백수(?)로 만들었다고.
첫 직장생활, 프랜차이즈를 배우다
권순만 대표가 외식업, 즉 프랜차이즈 업계에 몸담은 지도 벌써 20년이 넘어섰다. ‘2020 도쿄 올림픽’이 한창인 지금, 코로나19로 외식 프랜차이즈 업계는 쑥대밭이다. 하지만, 그가 외식업을 처음으로 내딛었던 당시는 2002년 월드컵 붐과 함께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였다. 우리나라의 월드컵 4강 진출은 많은 이들이 밤새 술을 마시며 이를 축하하고 축구 얘기로 이야기꽃을 피우던 시기다. 눈만 뜨면 주변에 식당과 술집들이 생겨났고, 한 집 건너 점포가 속속 오픈하던 시기였다.
더불어 프랜차이즈 사업도 활황이었고, 발 빠르게 시대의 흐름과 트렌드를 읽은 이들은 특별한 시스템 없이도 속속 가맹점을 늘려나갔고, 프랜차이즈 브랜드들은 점점 거대한 몸집을 키워나갔다. 권 대표는 이때의 프랜차이즈 시장을 ‘머리는 텅 비었으나 몸은 거대한 골리앗의 모습’으로 비유한다. 당시 기획 프랜차이즈나 묻지마 창업이 횡행했고, 프랜차이즈 본부나 가맹점 등 곳곳에서는 프랜차이즈의 성장통을 겪으며 시장이 급속도로 파이만 커지던 시기였다.
그 와중에 권 대표는 프랜차이즈 업계에 입문하게 된다. 하지만, 변변한 직장을 가져본 적 없기에 회사에 들어가서는 그저 상사로부터 자동차 세차나 이런저런 심부름꾼으로 푸대접을 받기 일쑤였다. 결국 물류센터 창고지기로 자신의 포지션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그런 일이라도 꿰찰 수 있었던 것은 그 나름의 성실하고 근면한 면면이 작게나마 발휘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는 자신의 첫 출근을 기억한다.
“누군가 던져준 주소지를 들고 찾아간 물류센터는 인기척 하나 없는 텅 빈 창고였고, 나는 무슨 일이든 해야겠다고 생각했기에 창고 바닥에 에폭시 마감 작업을 하면서 물류창고 모습을 갖춰나갔다. 2개월 정도 지나니, 물류센터 모습이 어느 정도 갖춰졌고, 식재료 보관에서 배송까지 모든 업무를 익혀가면서 시스템을 하나씩 구축해 나갔다. 원재료 공급가격을 정하기 위해 일일이 마트를 돌아다니며 몰래 가격을 수기로 적어와 밤마다 가격비교조사를 하는가 하면, 숫자가 맞지 않을 땐 처음부터 다시 적고 쓰기를 반복하며 밤을 새웠던 일도 다반사였다.” 컴퓨터로 일해 본적이 있을리 없던 그는 사무실에 ‘금연’이란 표지판 하나를 붙이기 위해 밤을 새워 컴퓨터를 배웠던 기억도 새삼스럽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했던 첫 직장생활은 물류에서 보관업무로, 구매업무와 신규브랜드 론칭, 조리부와 인테리어, 영업부에서 해외사업부까지 10년 동안 회사 내의 다양한 부서를 섭렵하며 프랜차이즈 사업을 위한 내공을 쌓아 간다. 당시 다니던 회사 대표의 신임을 얻어 대리에서 임원으로 사내에서 최단기간 고속 승진과 함께 해외시장 파견 등 중요한 업무와 부서를 모두 섭렵했다.
그 이후로도 베트남, 중국 등 동남아지역과 NGO 사업으로 평양도 수차례 방문했으며, 2년간 중국 심양에서 해외지사 및 지점을 오픈하기도 한다. 그렇게 10년간의 회사생활을 마친 그는 드디어 82.65㎡(25평) 규모의 <번짐>이라는 이자카야 콘셉트로 동네 후미진 곳에서 그의 첫 창업을 시작한다.
나의 첫 이자카야전문점 창업과 실패
프랜차이즈 기업에서 모든 것을 바치다시피 하며 올인했던 회사생활은 권 대표에게 많은 자신감을 주었다. “직장생활을 열심히 해왔듯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열심히만 하면 잘되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어요. 그래서 첫 창업이지만 큰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처참히 쓴 고배를 마셔야만 했죠.
내가 머릿속으로 아는 것과 몸으로 경험해본 것은 천양지차더군요. 장사는 생업이고 현실이지, 투자가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알게 됐죠. 회사에 몸담아오는 동안, 내가 잘해서 브랜드 론칭과 운영을 잘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회사가 잘 되어 내가 그 울타리 안에서 10년을 잘 다닐 수 있었던 것이었죠.(웃음)”
그는 당시 창업에 대한 자신감으로 한껏 부풀어 있었다. 아무리 외진 곳이라도 장사만 잘되면 번화한 밀집 상권이나 지역 상권 어느 곳에서도 프랜차이즈 개설이 잘될 것이라며, 성공을 확신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무리하게 1호점을 시작한 것이 실패의 요인이었다. 당시 그에겐 버틸만한 자본이 충분치 않았고, 브랜드 홍보 마케팅 등 부족한 문제들이 산재해 있었다. 장사는 잘되고 있었지만, 점포 영업만 잘해서 프랜차이즈 사업을 전개해 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권 대표는 “자본이 부족한 상태로 중심 상권이 아닌 주변 상권을 선택하게 되었다면 어느 정도 기간을 두고 맛집이든 대박집이든 매장을 명소로 만들어 놓고 가맹모집을 시작했어야 했어요. 그런데 오픈 초기, 매출만 믿고 가맹사업을 전개하려는 시작부터가 문제였죠. 그때의 쓰디쓴 경험은 현재 점포를 전개해 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즉, 상권에 따른 업종이나 혹은 업종에 따른 상권을 정하고 나면, 고객의 흐름이나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가격적인 가심비를 고려한 입점 전략도 중요하다는 것. 예를 들어 도심 번화가에서의 외식사업은 주변 경쟁 상대가 많고 주요 소비 연령층이 낮기 때문에 가급적 저렴한 메뉴를 구성해 유동성에 따른 테이블 회전율에 초점을 둬야 한다.
그렇지 않은 번화가나 후미진 곳에서는 오히려 단가가 높은 메뉴로 고객들이 입소문으로 찾아올 수 있도록 온· 오프라인 마케팅을 공격적으로 진행해 충성 고객을 만들어야 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첫 창업에 쓴 고배를 마시던 차에 마침 후배 회사로부터 마약 떡볶이로 소문난 개인 떡볶이 브랜드를 프랜차이즈화로 전개해 달라는 제안을 받게 돼 그는 다시 프랜차이즈 본부로 복귀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남의 브랜드를 성장시키다
그렇게 시작한 떡볶이 브랜드는 가맹점이 하나둘 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가맹점 70호점을 돌파시켰고, 그 이후 사업 부진과 파트너사들과의 복잡한 관계 등 이런저런 이유로 이자카야 전문점 프랜차이즈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당시 이자카야는 업종 특성상 일반상품들을 조리장이 직접 요리를 하여 판매하는 방식이었다. 그렇다 보니, 전용상품으로 판매할 수 있는 제품들이 소스류 외에는 종류가 많지 않았다.
이에 본사는 마케팅지원, 메뉴개발, 경영지원 활동 등으로 상호와 상표를 사용하는 로열티를 받는 방식으로 전국에 가장 많은 이자카야 브랜드를 전개해 활발한 프랜차이즈 사업을 펴게 된다. 과거에 <번짐>이라는 작은 점포를 운영했던 경험이 고객의 선호도나 가맹점주의 니즈를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물론 직원들과의 메뉴개발 과정도 말로만 하는 경영진의 의견이 아니라, 현장을 토대로 대화를 하고 메뉴를 개발해 나갔던 것이 큰 실효를 거뒀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브랜드는 결국, ‘NO 재팬’이라는 이슈에 맞물려 위기를 맞는다.
권 대표는 직장을 다니면서도 자신만의 소신이 있었다. ‘잘하는 일을 더 잘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못하는 일을 노력해서 더 잘해 보려는 것’이었다. 그는 항상 ‘어느 곳에서든 어떤 일을 하더라도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직업관이었고, 자신이 받는 월급에는 윗사람을 대신해서 욕을 먹는 값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회사의 임원이라면 외부에서 자금을 융통해오던가, 외부로부터 회사를 확장해가던가 반드시 결과를 만들고 그 결과에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외에도 권 대표는 수많은 예비창업자들의 멘토로도 활약해온 창업 컨설턴트이자, 자영업자와 가맹점주들의 입장에서 생각과 행동을 해온 실천가로 통한다. <25시>의 작가 게오르규가 자신을 ‘잠수함의 토끼’같은 존재라고 했듯, 그 역시 창업에 있어서만큼 예민하고 섬세해 『창업이란 긴 여정을 떠나는 당신에게』라는 책을 펴내 창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져봤을 단순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실패하지 않는 창업을 할 수 있도록 멘토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다.
나의 두 번째 창업 <노포식당>
20여 년 넘게 프랜차이즈 본부에서의 직장생활을 마감하고 그는 또다시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자신만의 길을 걷게 된다. 제2의 창업 시즌이 그에게 그렇게 활짝 열린 것이다.
권순만 대표는 평소 우리나라 프랜차이즈는 ‘패션’이라고 항상 강조해왔다. 유행에 민감하고 생존주기도 짧고 또 다른 유행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모습이 꼭 패션과 매우 닮아있기 때문이다. 이자카야 브랜드에 오래 근무하다 보니 수시로 일본을 방문하게 됐는데, 그곳에서는 100년, 200년 된 점포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짧으면 2~3년, 길어야 10년 이내의 짧은 생명주기를 갖는 프랜차이즈와는 정말 다른 풍경이었다. 그렇다고 100년 됐다고 음식 맛이 월등하게 뛰어나거나 인테리어가 뛰어난 것도 아닌데, 그곳 사람들은 100년 된 곳이기에 찾아간다고 한다. 정말 많은 생각이 드는 부분이었다고.
“그때 생각해 보니 저도 자주 갔던 식당이나 음식점들에 대한 추억은 남아 있지만, 발자취가 오래전에 사라진 것들이 대부분이었어요.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도시 계획으로 재건축 재개발을 해서 사라지거나 유행에 적응하지 못한다거나, 점점 나이가 들어 힘든 일은 자식에게 물려주기 싫어 사라지는 등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키는 점포 찾기가 쉽지 않았죠.”
하지만 최근 레트로 열풍이 일면서 그는 세련되고 깔끔한 분위기보다는 정감 있으면서도 세월의 흔적이 남아있는 매장을 고객들이 선호하며, 이러한 창업 아이템이 늘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앞만 보고 달려가던 시절에서 이제 우리도 한 번쯤 뒤돌아보는 문화가 서서히 생겨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손님들 발길이 오래 머물러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 역시 가정식 덮밥전문점 <노포식당>을 론칭하기에 이른다.
“특별한 맛보다는 한결같은 맛으로 오랫동안 고객이 찾는 매장,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이나 연인 혹은 친구들도 찾아오는 매장, 아침이든 저녁이든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매장, 이 계절이면 생각나는 매장, 집에 있는 아이들에게 음식을 포장하거나 배달이 가능한 매장, 초보자도 어느 정도 숙련을 거치면 조리가 간편한 매장, 시그니처메뉴가 있어 입소문으로 찾아오는 매장, 정결하고 깔끔한 이미지를 갖는 매장. 저는 이런 매장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가정식 덮밥 전문점의 차별화와 경쟁력
가정식 덮밥 전문점 <노포식당>은 브랜드명과 걸맞게 심플하면서도 임팩트 있는 인테리어 콘셉트를 선보인다. 확실한 시그니처메뉴인 대창덮밥과 곱창라면을 무기로 각종 덮밥류와 구이 및 전골류를 선보이며, 포장과 배달, 그리고 점심과 저녁 매출을 모두 올릴 수 있는 구조로 만들었다. <노포식당>은 유행이나 계절, 시간 등에 구애받지 않는 안정적인 외식 브랜드로, 폭넓은 성별과 연령층에 지지를 받고 있다.
예비가맹점주들에게는 투자대비 높은 수익률을 기대하게 하는 아이템으로 손색이 없다. 권 대표는 구이나 전골은 저녁 손님을 유치할 수 있지만, 점심과 저녁 두 시간대에 고객 유치를 위해서는 밥집에서 술을 먹는 고객의 소비패턴을 고려했다고 한다. 이것이 적중했다. 현재는 낮 시간대 식사류 40%, 저녁시간 구이 혹은 전골 주류포함 45%, 포장과 배달 15%의 매출 포지션을 보이고 있다. 물론, 이는 상권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다.
<노포식당>은 브랜드 론칭 준비기간이 자그마치 2년이 걸렸으며, 고객 반응을 접목한 본점 운영 기간도 2년이 걸려 총 4년간의 운영 시스템을 기반으로 외식문화 특유의 유행이나 코로나19 등 외부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안정되게 영업을 할 수 있는 브랜드로 안착했다.
특히 요즘같이 코로나19로 어려운 시기엔 그 어느 때보다도 위생과 청결에 가장 중요한 비중을 두고 있다. 아울러 <노포식당>은 가심비든 가성비든 소비자가 만족하는 브랜드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소비성향이나 니즈를 파악해 소비자를 리드해 가는 브랜드로 구축해 나갈 계획이다. 권 대표는 또 투자대비 수익률을 뒷받침해주는 프랜차이즈 사업이 되기 위해 본사와 가맹점 관계는 한시적인 계약으로 맺어진 가족관계라고 생각한다. “모든 창업자는 돈을 벌기 위해서 창업합니다.
본부가 가맹점 수익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가족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힘들죠. 때문에 브랜드 고유의 특성과 장점을 차별화해 다른 브랜드로부터 경쟁력을 가지며, 프랜차이즈 사업을 전개해 나갈 것”이라며 “차별화된 제품으로 고객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가맹점이 돈을 많이 벌게 된다면 그것이 가장 좋은 프랜차이즈 모델이 아닌가”라고 되묻는다.
100년 가업 잇는 프랜차이즈 만들 것
권 대표는 힘들 때마다 랜터 윌슨 스미스의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을 떠올리며 사업을 해왔다. 인생이란 ‘포기할 때 비로소 실패한 것’이라는 그는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즐겁게 하는 사람과 힘들게 일하는 사람의 차이는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힘들거나 여러가지 이유로 포기하게 된다면 결코 성공의 값진 열매는 얻기가 힘들겠죠. 한번 물면 놓지 않는 사냥개 근성처럼 불굴의 정신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제 삶의 모토입니다.” 그는 예비창업자와 기존 가맹점주들도 ‘쉽고 편하게 돈을 벌 수 있는 아이템’만 찾지 말고, 책이나 영화 속에 나오는 것처럼 머리와 가슴만으로 창업을 하려거든 당장 그만두라고 한다. 창업은 본인이 선택한 현실이므로 누구에게도 핑계가 될 수 없는 생존 현장이기 때문이다.
“뚜렷한 사업의식과 철저한 자기관리가 장착되지 않는다면 후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잡은 물고기를 싱싱하고 맛있게 먹으려면 잡은 물고기에도 밥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프랜차이즈 특성상 초보자도 쉽게 영업을 할 수 있도록 모든 시스템을 본사가 준비해 주지만, 영업을 하면서 발생하는 노무와 세무 특히 본사의 매뉴얼이나 지침 등은 가맹점주 본인의 몫이라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됩니다.” 프랜차이즈 본부가 모든 것을 제공해주지만,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적용해 나만의 노하우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운동경기에 공격과 수비가 있다면 이제부터는 공격적인 모드로 집중할 것이라는 권순만 대표. 2022년에는 <노포식당>과 함께 꿈을 공유할 많은 가맹점을 개설해 주목받는 브랜드가 될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다할 계획이다. “아직 <노포식당>은 스타트업기업의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생각하는 조직이나 시스템이 아직 미흡한 게 현실이죠. 하지만, A부터 Z까지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시간을 갖고 진정한 ‘노포브랜드’로 이끌 생각입니다. <노포식당>과 함께 꿈을 꾸고 그 꿈을 공유할 절실한 마음만 있다면, 언제든 환영합니다.”
권순만 대표의 최종 목표와 꿈은 <노포식당>이라는 브랜드 이름처럼 100년, 200년 가업으로 이어지는 ‘뿌리 깊은 프랜차이즈 전문 기업’을 만드는 것이다. 많은 시간, 현장에서 경험했던 실패와 성공을 잘 숙성시켜 끊임없이 목표를 향해 달리는 그의 성공 비책은 바로 ‘초심’이라는 기본에 있음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