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_ 족발의 대명사, 전국을 평정하다 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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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_ 족발의 대명사, 전국을 평정하다 ➁
  • 이인규 기자
  • 승인 2014.07.25 11: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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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발계의 고유대명사 <장충동왕족발>

발의 대명사, 전국을 평정하다
족발계의 고유대명사 <장충동왕족발>

서울 장충동에는 족발이 맛있기로 유명한 거리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장충동 족발ʼ이라는 고유명사는 전혀 다른 지역에서 태동한 브랜드의 활약 덕분에 생겨난 것일 수도 있다. 바로 <장충동왕족발>의 브랜드력 덕분인 것이다. 그간의 노력 덕분에 이제는 굳이 맛있는 족발을 먹기 위해 서울 장충동까지 걸음하지 않아도, 전화 한 통이면 최고의 족발이 우리집 안방까지 찾아온다. 이렇게 국민들에게 족발의 원조격으로 인정받기까지는 28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고 <장충동왕족발>에는 그간 셀 수 없는 위기와 난관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난관들은 지금의 전국을 넘어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하게 되는 성장통으로 남게 됐다.

▲ 지방브랜드의 대표격인 <장충동왕족발> 가맹점 모습 ⓒ 사진 <장충동왕족발> 제공

언제나 그렇듯 위기는 기회다
<장충동왕족발>의 역사를 들추다 보면 신신자 대표의 생생히 살아있는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가진 맛에 대한 철두철미한 철학과 과감한 행보로 지금의 사세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과거 대전에서 이름 꽤나 날리던(?) 그는 남편의 사업이 폭삭 주저앉으면서 나이 42세에 사모님이 아닌 가맹점주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한 때는 5층짜리 건물에서 월세만 3000만 원을 받아가며 살기도 했었다. 당시 대전 148㎡(45평) 크기의 아파트 분양가가 7000만 원 내외였으니 그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건설업을 하던 남편의 사업이 한순간에 무너지면서 가정과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순간이 닥친 것이다. 그때 그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보냈었던 부산으로 가서 새시작을 하기로 결정한다. 대전에서 주위 사람들을 대할 자신이 없기도 했다.

1997년 그는 <장충동왕족발>부산 동래점 가맹점주로 이름을 올렸다. 처음 하는 장사라 체인점을 선택한 것인데, 이 결정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게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330㎡(100평)정도의 가게는 초반 3개월을 넘어서자 자리 잡기 시작했다. 고객들의 좋은 반응이 연쇄적으로 나타나자 줄을 서기 시작했고, 그 소문은 본사에 전해지기 시작했다. “장사에는 왕도가 따로 없다. 맛있어야 하고 푸짐하게 줘야하며, 청결하고 친절하면 손님은 알아서 찾아오게 돼있다. 동래점을 운영하면서 이 점을 가장 철저하게 지켰다.” 그런 그의 노력 덕분일까? 본사에 그의 존재가 알려지고, 결국엔 본사 체인본부장까지 맡게 됐다.

▲ <장충동왕족발> 신신자 대표 ⓒ 사진 <장충동왕족발> 제공

점주에서 경영주로 대변신
친절하고 철저한 경영철학으로 동래점을 확 띄어놓은 그는 본사의 체인본부장으로 부름을 받았다. 그는 장사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이런 끼를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경영을 하면 할수록 체질에 맞고 마치 맞춤옷을 입은 듯 더 활동성 있는 모습을 보이게 됐다.
그러나 그런 그가 체인본부장으로 재직하던 <장충동왕족발> 창업 17년차에 큰 위기가 찾아왔다. 바로 법원의 지명사용 허용 판결에 불만을 품은 가맹점주들의 파동이 일어난 것이다. 가맹점주들의 조직적인 반발에 하나 둘 이탈하는 점주가 늘어났고, 거기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창업주가 폐업신고라는 초강수로 맞대응을 했다.

이때 신 대표의 설득의 묘가 발휘됐다. 그는 창업주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심어린 설득으로 회사를 인수하게 된다. 모든 자산을 털어서 가맹점을 운영하고 있는 선의의 가맹점주들을 생각해 폐업대신 운영권을 넘겨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가맹점 3년, 체인본부장 2년 근무로 지금까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여겨 본 창업주는 그에게 넘겨주기로 마음먹고 정리해 준다. 현재의 본사건물을 경매에서 7억 원에 넘겨받고 경영일선에 서게 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선장이 바뀌면 내부가 뒤숭숭하게 되는 법, 특히 우여곡절을 겪은 직원의 이탈과 반목을 부추기는 일부 가맹점들과의 갈등은 필연적이었다. 하지만 그의 강단 있는 성격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분리할 것은 분리하고 결합시킬 것은 결합시켜 나갔다. 그리고 나서 3개월, 떨어져 나간 가맹점주들이 속속 복귀하기 시작했다. 본사의 도움 없이는 원래의 맛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객들이 누군가. 맛 하나는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는 사람들 아닌가. 옛날의 맛을 기대했던 고객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다시 본사에 응급호출을 한 것이다.

▲ <장충동왕족발>의 대표메뉴 ⓒ 사진 <장충동왕족발> 제공

그렇게 다시 시작한 <장충동왕족발>은 2002년을 기점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처음 인수할 2001년에는 86개였던 가맹점 수가 1년 뒤에는 130여개로 늘어난 것이다. 매출도 갈수록 늘었다. 그래서 그의 사업구상에서 뺄 수 없었던 진천 제2공장 설립을 앞당기게 됐다.

맛과 위생에서 절대적인 철학으로 고객감동 이끌어
숱한 어려움은 그의 경영사에서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진천 제2공장을 지으려 할 때 은행권에서 자금을 대주지 않아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때 그는 “반드시 그들이 인정하는 회사를 만들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5년 뒤인 2009년 10월, 청원공장 준공으로 그 다짐을 현실로 그려냈다.

이러한 그의 욕심은 <장충동왕족발>이 위생과 맛에서 따라올 수 없는 아성을 쌓는데 기둥 역할을 하게 된다. 현재 청원공장은 내부 설비공사에만 100억 원 이상을 소요했다. 물론 땅값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곳에는 모든 시스템이 완전자동화로 진행되고, 전처리 위생시스템도 구축돼있다. 생산량은 기존의 200톤에서 5배인 1000톤으로 확대됐다.

▲ <장충동왕족발> 청원물류공장

그리고 인프라만의 성장을 위해서 지어진 청원공장이 아니기에 일정한 맛과 고객들이 기억하는 최고의 족발을 만드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그래서 <장충동왕족발>만의 냄새 없기로 유명한 족발을 만들기 위해 매일 16가지의 한약재와 무, 배추 등 최고급 식재료를 통해 최고의 음식을 가맹점주들에게 공급하고 있다.

 

Tip_ <장충동왕족발>의 전국 평정 키워드
·과감한 시설투자로 물류확보
- 청원물류공장 완공, 투자금만 150억 원 이상
- 해외진출 등 대폭 늘어날 물류량 예상, 그리고 적중

·물류공장 내 최신 시설로 위생과 일정한 맛 유지 가능
- HACCP인증, 호텔 같은 공장, 2013년 일본 농림성의 열처리 가공시설인증
- 국내 유일하게 일본으로 가공육 수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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