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브라더스컴퍼니 김대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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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브라더스컴퍼니 김대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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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12.16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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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념의 승부사 ‘깐풍기’ 프랜차이즈로 거침없이 질주하다


Profile
“깐풍기? 지방이니까 되지, 서울가면 무조건 망한다”고
모두가 말렸지만… 편견을 깨다

깐풍기 전문프랜차이즈 <깐풍기프라더스>를 운영 중인 (주)브라더스컴퍼니의 김대희 대표는 우선 첫 대면에 짧게 기른 콧수염이 인상적이다. 어린 시절 부유한 집안의 ‘도련님’으로 자란 그는 중 3때 보증을 잘못 선 아버지의 파산으로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10평도 채 안되는 원룸으로 이사를 가고 중국집 아르바이트 일선에 나선다. 그러나 그는 특유의 넉살과 무서울 정도의 목표에 대한 강한 집념으로 고비마다 오뚝이처럼 일어나곤 한다. 20살부터 시작한 가게 운영으로 이미 상당한 수준의 경영마인드가 장착돼 있을 정도로 다양하고 많은 실전 경험을 쌓아왔다. 한때 초록색칼국수로 50여개까지 전수창업을 했던 값진 이력도 가지고 있는 그는 이제 프랜차이즈 업계의 무서운 30대로 발돋움하고 있는 중이다. 외식업계의 무덤이라고까지 불리는 격전지 홍대 앞에서 지역 브랜드로서는 아주 드물게 살아남은 것은 물론 30여개의 가맹점까지 늘려 놓는 수완까지 발휘하고 있는 프랜차이즈 업계의 미완의 기대주다. 남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엄두조차 낼 생각을 못했던 ‘깐풍기’를 앞세워 프랜차이즈 사업에 뛰어든 것 자체가 이미 이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이변이 어디까지 갈 지 창업자들과 업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그의 나이 이제 32살이다.


침체된 경기 상황에도 약속된 해외 연수 진행
머릿 속이 확 개인 청명한 가을하늘 느낌이다. 연말을 앞두고 태국 홍콩으로 우수사원들과 4박5일의 연수를 가면서다. 이번이 여덟 번째다. 기업화하려면 아직 이르지만 차근차근 그 족적과 흔적을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다. 한 기업의 스토리텔링이 감동을 주려면 각이 지고 촉이 서 있는 틀이 장치되어 있어야 한다. 이 가시밭길을 극복할 때에만 가슴을 찡~하게 만들고 감흥을 안겨줄 수 있다. 격동의 세월이 없는 스토리텔링은 온실 속의 화초다. 어쩌면 그걸 지금 준비하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아직 사치라고 한마디씩 툭 던지곤 한다. 신경이 쓰인다. 그러나 해외 연수에서 얻은 실익은 꽤 된다. 직원들의 마인드가 변화하는 걸 감지할 수 있다. 새로운 시야로 다양성을 찾으려한다. 무엇보다 재충전의 기회로서는 최적이다. 계속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이유다. 비행기 트랙을 밟고 올라서는 순간 가볍고 부드럽고 따스한 깃털들이 그의 옆구리로 스며든다.
최근 몇 년간 주점가에 열풍처럼 번졌던 치맥(치킨+맥주)의 대항마를 자처하며 지방에서 혜성처럼 등장해 주목을 받았던 깐맥(깐풍기+맥주)의 창시자 (주)브라더스컴퍼스의 김대희 대표(32)는 올 연말 어김없이 우수사원들과 함께 해외 연수길에 올랐다. 올해는 다른 해와 달리 경기가 위축돼 부담스러웠지만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중단하지 않았다. 깐풍기맥주전문점인 <깐풍기브라더스>의 행보가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충북대를 비롯, 전북대, 청주대 등 지방 대학가 앞에서 유명세를 떨치며 일취월장하던 그는 작년 5월 서울 홍대 앞에 6호점이자 서울 진출 1호점을 오픈한 지 1년 6개월만에 30여개의 가맹점을 오픈할 정도로 기세가 등등하다.
특히 고가의 메뉴인 깐풍기를 대중화시킨다고 했을 당시 우려한 이들을 보란 듯이 잠재운 강심장의 CEO이기도 하다. 그것도 치맥이 맥주시장과 주점업계를 휩쓸고 있을 무렵에 무모하게도 깐풍기를 들고 나와 ‘깐맥’을 부르짖었으니 오죽했을까싶다. 그러나 김 대표는 해냈다. 요즘 젊은이들의 입에서 종종 ‘깐맥’ 한잔하러 갈까하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기 때문이다. 맥주업계의 문화를 바꾸겠다고 나선 이 돈키호테 같은 패기만만한 젊은 대표에 관심이 집중되는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청주의 부잣집 ‘도련님’, 원룸으로 이사하다
시원시원한 움직임에서 나오는 자신감, 언어의 이음새를 조였다 풀었다 할 줄 아는 조정능력, 상황판단을 조율할 줄 아는 순발력, 무엇보다 목표물에 대한 강한 집념 등은 그만이 가질 수 있는 캐릭터다. 그의 첫인상에서 느낀 인정스러우면서도 사교성이 가미된 동선은 고객들과의 동반자로서 제격이다. 그러면서도 묵직한 언행은 그의 롱런이 기대되는 배경이다. 그는 어떻게 해서 이 어려운 시기에 깐풍기를 들고 나와 프랜차이즈 시장을 흔들고 있는 것일까. 그의 비장의 무기는 무엇인가. 과연 그는 철옹성처럼 견고한 치킨시장의 벽을 넘어 깐풍기로 성공한 프랜차이즈 CEO로 거듭날 수 있을까. 창업자들과 프랜차이즈 업계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려있다.
대전이 고향인 김 대표는 부친의 사업으로 인해 태어나고 자란 청주가 제 2의 고향이다. 그의 어린 시절은 부유했다. 반도패션 충북지역 총판을 맡았던 아버지와 100평 규모의 한정식 식당을 운영했던 어머니 덕에 부러운 게 없었다. 말 그대로 ‘도련님’으로 지냈다. 그러나 16살 되던 해, 그의 인생은 굴절을 겪는다. 아버지가 큰 사업을 하던 친구의 보증을 서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결국 아버지 사업은 부도위기에 몰리고 어머니의 가게에까지 여파가 미친다.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사라지는 최악의 상황에 처하게 되고 그는 태어나서 처음 10평도 채 안 되는 원룸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간다.
부모님의 상처받은 눈물의 모습이 아직도 아련히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게 만든 게 이즈음이다. 어리둥절했다. 어린 그에게 일일이 설명해주기 어려운 게 어른들의 세계 아닌가.
그는 그렇게 중학교 3학년인 16살을 보내고 있었다. 방황이 심했다. 사고 칠 뻔도 했다. 방에서 깊은 번뇌와 씨름하던 부모님은 얼마쯤 지났을까, 훌훌 털고 생전 안 하던, 아니 꿈에라도 행여 꾸지 않았을 택시 운전기사와 남의 집 ‘식모’ (요즘은 가사도우미)를 나가시는 게 아닌가. 미술공부로 유학 간 누나와 아들의 교육비를 마련하기 위해 과거의 영화와 종지부를 찍은 것이었다. 

방황하던 17살....... 식모로 나선 어머니 보고 반성
저녁이면 어머니가 아버지의 어깻죽지에 파스를 붙여주었다. 안 하던 운전을 하루 종일 하다보니까 어깨가 많이 쑤신다고 했다. 정신이 번쩍 났다.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다 싶었다. 열심히 사시는 부모님을 보면서 마음을 고쳐먹었다. “보통 큰 부자로 살다가 망하면 우울증이니 뭐니 하면서 자살도 많이 하는 걸 보았다. 그런데 부모님은 각자 옛날의 영광은 잊고 현실로 돌아와 운전사와 식모로 신분을 바꿨다. 이게 현실인가 하고 자문하곤 했다. 아침에 일 나가시는 부모님 뒷모습을 보면서 마음을 고쳐먹었다. 열심히 해야겠구나. 그러면서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17살 고교 1년생을 직원으로 채용하는 곳은 거의 없었다. 퇴짜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여러군데 일자리를 알아보던 중 의류전문 쇼핑몰인 <메가폴리스>내부의 한 중식당에서 배달직원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쏜살같이 달려가 아르바이트를 지원한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문전박대를 당한다. 그는 3일간을 찾아가 통사정한다. 김 대표의 끈질긴 구직 애원에 결국 마음이 움직인 주인은 그를 허락한다. 17살 봄에 그의 첫 사회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어린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끈기와 목표에 대한 집념을 읽을 수 있는 하나의 단초로 치부할 만한 사건이었다.
이러한 목표를 향한 집념과 추진력은 훗날 그가 자기 사업을 하면서 하나의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며 지렛대 역할을 톡톡히 해 낸다. 그러나 그의 꿈은 원래 부친이 하던 의류업이었다. 하지만 의류매장에서는 어린 남자 알바는 물론 고등학생을 고용하는 곳은 거의 없었다. 동경과 선망의 대상으로만 맘에 품고 다니고 있을 즈음 중식당 단골이던 의류도매상 형한테서 1일 알바제의를 받는다. 서울 동대문으로 물건을 사러 가는데 가게 볼 사람이 없으니까 대신 봐 달라는 것이었다. 기회가 온 것이었다. 중식당 주인도 김 대표의 꿈을 알고 있던 터여서 1일 알바를 기꺼이 허락했다. 이번 기회에 눈도장을 확실히 찍어둬야 한다는 생각에 일찍부터 나가서 청소하고 판매준비를 했다.
그러나 가게에 들르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10시에 영업 마감을 해야 하는데 9시까지 거의 발길이 없을 정도였다. 조바심이 났다. 초조했다. 하나라도 팔아야 인정을 받는데 하고 생각하니 못할 게 없었다. 허리띠를 들고 ‘삐끼’(호객행위)도 불사했다. 그러자 장사를 하도 잘해 ‘동대문의 전설’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옆집 가게 주인이 나와 막 야단을 치는게 아닌가. ‘나이도 어린놈이 자장면 배달이나 하지 왜 이곳에서 삐끼 짓을 하며 물을 흐리냐’며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고교 1학년 중국집 배달 나가다 야단맞고 ‘눈물’
야단을 된통 맞고 보니까 어린 나이에 서글퍼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태어나서 처음 느낀 서러운 감정이었다. 옆집 가게 주인이 보기에 딱했던지 밥은 먹었냐며 우유와 빵을 사주고 갔다. 사실 물건을 하나도 못 팔아 밥을 먹기가 민망해 안 먹은 상태였다. 그러나 고수는 선수를 알아보는 법이 아닌가. 평상으로 돌아와 중국집에서 배달을 하고 있는데 자기를 혼냈던 가게 주인이 찾아온 것이었다. 자신의 가게에 와서 일하라는 것이었다. 보통 어린 학생들은 창피해서 한 쪽에서 쭈빗쭈빗하기 십상이고 또 남의 가게를 위해 밥도 안 먹어가며 적극적으로 나서 사람들을 모으려고 하지 않는데 그는 달랐다는 것이다. 그것이 마음에 들어 스카우트하게 되었다는 걸 나중에 얘기해 줘 알게 된다.
그의 이러한 적극성과 목표에 대한 집념은 훗날 성인이 되어가면서 승부사 기질로 나아간다. 일주일에 5일 정도는 서울의 동대문 시장에 따라다니며 장사를 배웠다. 저녁 늦게 서울 갔다 온 날은 아침 6시에 집에 들어가 씻고 곧바로 나와 학교로 향했다. 그는 특유의 넉살 좋은 붙임성과 적극성 그리고 친절한 서비스로 판매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주변에서 2학년 고등학생을 서로 데려가려고 신경전을 벌일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한 장소에서 2년여를 보낸다.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교 졸업 전인 겨울 방학을 기해 독립해서 장사를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당시 60만원하던 월급을 그는 판매를 잘해 인센티브가 적용돼 100만원 상당을 받았다. 그해 1월 중순 골목의 5평짜리 가게를 얻어 옷 장사에 나섰다. 한 달에 200~300만원의 수입이 들어왔다. 부모님 빚을 갚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무슨 수가 없나. 그러던 중 가게에 들른 한 손님으로부터 나이트클럽에 나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귀띔을 듣게 된다. 그는 며칠 후 지인을 통해 나이트클럽에 발을 들여놓는다. 손님들 비위를 맞추는 것이 고역이었지만 견딜 수 있었다.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낮에는 옷가게를, 저녁 10시부터는 나이트클럽에서 영업을 하는 이중생활에 들어갔다.
남들이 기피하는 화장실, 토사물 청소 등 궂은 일을 도맡아하면서 돈을 모았다. 3개월이 흐르고 관록이 붙자 수입이 2배, 3배 증가하기 시작했다. 한 달에 1500만원 내외의 거금이 손에 잡히기 시작했다. 20살 나이에 옷가게 수입을 포함해 월 1700~1800만원이 들어왔다. 돈은 퇴근 후 어머니 머리맡에 두고 나왔다. 모두 다 현찰이어서 매일 새벽 퇴근 무렵이면 돈이 주머니에서 삐져나오기 일쑤였다. 그러나 집안의 빚이 워낙 많아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었다. 그렇게 2년 반을 근무하다 군대를 갔다 온다. 제대 후 그동안 부모님이 하던 조그만 식당을 다시 리뉴얼해 외식사업에 참여하게 된다.

초록색칼국수의 대박행진 그러나 채무자들의 횡포로 폐업
그는 홍합과 굴 그리고 부추가루를 갈아 만든 홍굴부추칼국수를 대표메뉴로 내놓고 영업에 나섰다. TV에 청주의 명물 초록색칼국수가 소개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고 손님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30평 규모에서 한 달에 4000만원을 팔았다. 줄 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로 인기 폭발이었다. 이번에는 가맹점을 내달라고 사람들이 졸랐다. 물류시설과 가맹점 준비가 안 된 그는 기술이전료로 1000만원씩 받고 전수창업으로 50개 가까이 점포를 내 주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그동안 잠잠하던 빚쟁이들이 가게가 성업을 하고 가맹점이 늘어나자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해 매일 가게에 나와 진을 치고 영업을 방해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결국 빚쟁이들의 횡포를 못이긴 부모님은 2년 만에 가게를 포기하고 대전으로 내려간다. 26살 때 다시 빈손이 된 그는 가게에 들어가는 자본금 마련을 위해 생면부지인 도시, 부산 하단으로 내려간다. 청주라는 도시에 진력이 난 그는 아예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이곳 여인숙에서 먹고 자면서  다시 나이트클럽 웨이터 생활을 하며 7개월 동안 목표 금액 3000만원을 마련한다. 다시 청주로 온 그는 6개월간 운영해 온 옷가게를 2배 가까운 금액을 받고 처분한 뒤 이웃의 호프집을 인수해 본격적인 외식인으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주방에 직접 들어가 안주를 다 바꿨다. 칼국수 집을 운영했던 경험을 다시 살려 모든 부분을 다시 리뉴얼했다.

다시 시작한 웨이터 생활, 7개월만에 3000만원 모아
그러나 술집의 안주 만드는 게 결코 쉽지 않았다. 다행히 노련한 주방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초반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모이곤 한다. 그래서 그에게 인복이 많다고들 한다. 그의 싹싹한 일처리와 포용력 그리고 배려를 우선하는 그의 성향이 크게 작용한 결과다.
“그리 많지 않은 나이에 다양한 경험을 쌓다보니 먼저 상대방을 생각하는 습관이 만들어진 것 같다. 옷가게를 처분하고 호프집을 인수했을 당시 주방아주머니가 없었으면 어려움이 무척 컸을 것이다. 다행히 그분 덕택에 초창기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지금도 연락을 하고 <깐풍기브라더스> 2호점 할 당시 메뉴도 도와주었다. 주변에 이렇게 십시일반으로 도와주는 지인들이 있어 지금까지 큰 위기 없이 온 것 같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나갈 즈음, 집안의 부채문제가 불거져 다시 가게를 팔아야만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빚을 청산하고 나자 손에 남은 돈은 2700만원에 불과했다. 이걸 갖고 무엇을 해야 하나. 그는 함께 일을 해 왔던 친구와 호프집에서 같이 일했던 매니저 그리고 자신 등 셋이서 전주로 내려간다. 아무 연고도 없는 전주에서 장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호프집을 하면서 치킨이나 탕수육을 많이 만들어 본 경험이 있어서 처음에는 치킨 가게를 염두에 두었는데 너무 많아 포기했다. 그리고 우연히 중국집에서 주문한 깐풍기의 맛을 보고 필이 꽂혔다. 깐풍기를 대중화시키면 어떨까.
이것도 똑같은 닭인데 왜 일반인들에게는 낯설까. 고민을 계속하면서 내린 결론은 인식과 발상의 전환을 동시에 시키면 가능성이 크다는 답이 나왔다. 깐풍기전문점을 내고 영업이 활성화되면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초록색칼국수>로 전수창업을 50개 가까이 하다가 도중에 그만 둔 아쉬운 기억도 있던 터였다. 전북대학교 앞 뒷골목에 15평짜리 가게를 얻었다. 자금이 없어 인테리어도 2달에 걸쳐 셋이서 직접 했다. 2009년 8월 중순, 28살 때 <깐풍기브라더스>(당시는 ‘김대희의 북경깐풍기’) 1호점이 드디어 문을 열었다. 메인 메뉴인 북경식 깐풍기 하나 그리고 간단한 안주로 승부했다. 그러나 상권이 외진데다가 완전히 골목 끝이어서 손님들 받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28살 <깐풍기브라더스> 1호점......
생일날 미역국에 눈물 ‘글썽’

하루에 2~3개 테이블로 월 300만원 정도의 매출을 올렸는데 세 사람 인건비도 건지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일단 깐풍기 맛은 다들 “괜찮다”고들 하는데 제2, 제3의 방문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 있는 서비스로 승부수를 띄웠다. 남은 음식은 무조건 먼저 포장해 준다고 하고 음료수도 무료로 서비스했다. 생일을 맞은 손님에게는 미역국을 끓여 밥과 함께 김치를 주는 파격적인 실험도 감행했다. 끼니를 걸렀다고 하면 라면도 그냥 끓여주었다. 손님들 대부분이 학생들이라는 점을 감안한 서비스였는데 정확하게 의도하는 바가 적중돼 나갔다.
심지어 생일을 맞이한 지방학생들의 경우 생일날 미역국 제공에 울음을 터트리는 학생까지 있을 정도로 인기 폭발이었다. 손님들이 달을 거듭할수록 늘어나더니 7개월 만에 월 매출 3500만원을 올리는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는 메뉴를 하나씩 늘려나갔다. 광동식깐풍기 그리고 사천식해물깐풍기도 시차를 두고 연달아 추가했다. 전주에 진출한 지 1년을 넘길 즈음 청주 호프집의 사장님들이 안부 차 방문을 하고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초창기 한 번 들를 무렵에는 허접하기 그지없어 보였는데 손님들로 꽉 차 있는 매장을 보고 감탄을 하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테이블에 손님이 거의 없던 초창기 시절 들렀던 청주의 어른들이 당시 나를 측은하게 생각해 다시 청주로 가자고 권유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1년을 넘기고 다시 방문했을 당시에는 상황이 180도 바뀐 상태였다. 충격이 컸던지 아무 말도 못하더라. 그리고는 청주에 점포를 하나 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2호점 형태로 운영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충북대학교 앞에 48평짜리 가게를 하나 얻어 2호점으로 간판을 달고 운영에 들어갔다. 그러나 가맹점 형식으로 내준 2호점은 점포 크기에 비해 매출이 3000만원에 머물러 점주가 김 대표에게 점포를 매각하게 된다.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는 타입, 지방에서 직영 3개 가맹 2개 운영

그는 충북대학교 점포를 인수함과 동시에 청주대학교 앞에다 직영 3호점을 연달아 오픈하는 모험을 시도한다. 주변에서 그의 사람 됨됨이를 보고 투자하고 도와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그러면서 충북대학교 2호점 점포의 매출을 8000만원까지 끌어올리는데 성공한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가맹점을 내달라고 조르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아직 가맹사업 준비를 하나도 안 해 놨는데 그냥 막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여기서 2개의 점포를 직영점 형식으로 오픈시켜주면서 모두 5개의 점포를 운영하게 된다. 그의 꿈이 점점 더 현실화 돼가고 있었다.
2년 동안 세금문제, 물류, 법인설립 등 다양한 경험을 쌓은 그는 프랜차이즈 사업을 본격적으로 하려면 서울에 가서 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판단에 상경을 결심한다. 지방에서 깐풍기로 돌풍을 일으킨 저력을 바탕삼아 서울 입성에 나선 것이다. 홍대 앞에 둥지를 틀었다. 이곳은 외식업계의 최대 격전지다. 이곳에서 살아남으면 실력있는 외식인으로 인정받는 풍토가 돼 버린 지 오래다. 그를 따르는 8명의 <깐풍기브라더스> 형제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원대한 포부를 품고 온 그는 초창기 서울의 문화를 몰라 가슴을 쓸어내려야만 했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오는 사람도 없고 고객들도 외면하는 시간을 견뎌내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2012년 6월에 올라와 21평 매장에 테이블 11개를 놓고 영업에 들어갔다. 청주에선 많이 받으면 하루에 150개의 테이블을 받고 영업을 하는 잘 나가는 사장이었는데 한 테이블도 못 받는 날이 여러 날 생겼다.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수입은 없고 지출비용은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그를 믿고 따라올라 온 동생들 보기 미안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다시 전열을 정비했다.
깐풍기 맛을 일반인들에게 우선 많이 알려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일단 시식하면 다들 맛있다고들 하는데 아직 깐풍기에 대해 모르는 이들이 많은 것으로 분석됐기 때문이다. 두 달 무료시식을 하고 전단지를 계속 돌렸다. 반응이 서서히 오기 시작했다.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망한다. 내가 필요한 물건을 줍기 위해서는 허리를 굽혀야 한다.
그리고는 ‘작은 배려’라는 타이틀의 디테일한 서비스도 병행했다. 담요, 핸드폰 충전기, 우산, 남은 음식 포장하기, 간단한 비상약품 준비 등의 서비스를 하기 시작하자 손님들이 맛있고 서비스가 좋은 음식점으로 블로그를 올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깐풍기에 맥주를 합성한 ‘깐맥’ 프로젝트도 제법 사람들의 입에 오르기 시작한다. 메뉴도 발전을 거듭했다. 꽃빵과 파채를 올려주는 매콤한 북경식깐풍기, 꿀에 찍어먹는 광동식깐풍기, 북경식스타일에 파채 대신 숙주랑 해물이 들어간 사천식해물깐풍기, 닭똥집으로 깐풍기를 만들어 깻잎에 싸먹는 닭똥집깻잎깐풍기, 감자튀김을 꿀에 버무려서 수북히 쌓아주고 갈릭 마늘을 넣어서 볶은 갈릭깐풍기 등 메뉴들이 속속 출시되면서 고객들의 반응은 더 뜨거워져 갔다. 지금도 계속 깐풍기 메뉴를 연구하고 있는 중이다.
“서울 올라와서 10개월 동안 힘이 많이 들었다. 월세를 내기위해 빚을 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손님이 없었다. 그래서 타고 다니던 차는 물론 돈이 될 만한 것은 모두 팔았다. 무엇보다 같이 올라온 동생들이 알아서 월급을 안 받겠다고 해 준 게 큰 도움이 됐다. 만일 그 당시 월급을 모두 주는 상황이었으면 지금 <깐풍기브라더스>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동생들인 병용, 철연, 상욱, 지영, 민국, 준혁, 성찬, 동섭 등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서울에 입성한 지 2년이 다 돼 간다. 현재 가맹점은 30여개 이르고 있다. 어려운 경기 상황에 견주면 비교적 짧은 기간에 빠른 성장을 해 온 셈이다. 지금도 깐풍기라는 차별화된 아이템과 다양하고 톡톡 튀는 메뉴들로 인해 가맹점 문의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그의 고객들을 위한 남다른 배려, 가맹점주들과 운명을 함께 하겠다는 각오, 젊음을 무기로 한 다양한 아이디어의 분출 등이 김 대표의 오늘을 있게 한 디테일한 동인들이라면 지칠 줄 모르는 열정, 목표를 향한 불도저 같은 추진력, 남을 배려할 줄 심성 등은 그의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잣대다. 이들이 어떤 시너지를 발휘해 30대 초반의 CEO를 반듯한 반석위에 올려놓을지는 아직 두고 볼 일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부드러우면서도 진중한 그의 눈빛이 길게 여운을 남긴다.

글  이덕철 발행인  사진  박세웅 팀장
캐리커처  원소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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