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회사법인 (주)인건 청국장과 보리밥 오기성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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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회사법인 (주)인건 청국장과 보리밥 오기성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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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3.17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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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장 사랑’을 프랜차이즈로 풀어내다
▲ 청국장과 보리밥 오기성 대표 캐리커쳐 원소정 작가

 

사회복지사업을 위한 청국장의 눈물어린 성장통
한식 프랜차이즈 브랜드 <청국장과 보리밥>을 운영하는 오 기성 대표는 남다른 이력과 캐릭터를 보유한 선비 유형의 CEO다. 대학에서 전자 분야를 전공하고도 자동차 세일즈맨으로 근무를 하고 또 다시 사회복지사업의 꿈을 위해 대학의 문을 다시 두드린 흔치 않은 케이스다. 사회복지라는 큰 꿈을 이루기 위해 대기업의 혜택을 뿌리치고 장모님의 권유를 따라 보리밥 가게를 할 정도로 집념이 대단하다. 외식 초년생들이 흔히 범하는 자기 잘난 맛으로 가게를 운영하다가 빚만 지게 된 그는 이후 장모님을 멘토 삼아 심기일전해 사업을 조금씩 키워나간다. 외식과 프랜차이즈와 관련된 각 기관의 교육 프로그램을 무려 22개나 이수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정보에 목이 마르다고 하소연한다. 청국장 프랜차이즈로 국내에서 최고의 명성을 가지고 있는 그는 올해를 도약의 해로 설정하고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그가 내밀 카드는 과연 무엇일까. 예비창업자들의 답답한 속내를 뚫어 줄 한 방이 기다려진다.

국내 최고 청국장 전문 프랜차이즈로 ‘명성’
새로 이사한 집이다. 반듯하고 청결하며 명랑한 느낌이다. 가구가 들어온다. 주로 자연친화적인 물건들로 상당수 채워져 있다. 침대도 그렇고 옷장도 그렇고 서랍들도 한결같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내와 세 명의 아이들 그리고 웬일인지 장모님까지 얼굴을 내미시는 게 아닌가. 각자 자기의 방을 구경하며 신나한다. 향토적인 그림과 색감으로 버무려진 벽지에는 건강함이 폴폴 묻어나온다. 널찍한 거실에서 청국장으로 만든 강정과 미숫가루 슬러시를 가족이 앉아 마신다. 고소함이 일품이고 고향의 풍미가 코가 아닌 혀로 스며든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갑자기 커튼사이로 불길이 치솟는다. 아~~~~ 이게 무슨 조화일까. 곧이어 누군가 툭 나의 배를 차는 게 아닌가. 잠에서 깨 벌떡 일어났다. 아내의 발이 배위에 있었다. 아! 꿈이었다. 요즘 사업확장을 위해 이런저런 고민으로 생각하는 시간이 많다보니, 꿈 엮시 예사롭지 않은 듯했다.

프랜차이즈 사업에서 가장 힘든 분야가 한식이다. 국물이 있어야 하고 반찬도  매일 바꿔주어야 하는 특성으로 인해 표준화와 시스템 구축이 어려운 분야로 불린다. 한식 프랜차이즈 브랜드 <청국장과 보리밥>을 운영하는 농업회사법인 (주)인건의 오기성 대표(46)는 그럼에도 이 분야를 고집스럽게 강조하며 한 길을 걷는 CEO다. 청국장 분야에서는 국내 최고의 브랜드로 손꼽힌다. 
그는 요즘 해가 바뀌면서 올 초에 꾸었던 ‘새 집의 불난 풍경’ 꿈을 기억 속에서 자주 꺼내어 들춰보며 음미한다. 올해 가맹사업을 본격적으로 활성화시켜 청국장의 맹주가 되겠다고 청사진을 수립해 놓은 시점에서의 묘한 꿈이라서 그렇다. 사업이 활활 타오를 것 같은 예감을 준 꿈으로 그는 해몽하고 있어서다. 현재 <청국장과 보리밥>은 직영점 4개, 가맹점 18개 등 모두 22개의 매장을 운영 중으로 이 분야 최고 브랜드로 평가받고 있다. 오 대표는 청국장 전도사로도 유명하다. 
청국장 하나만 가지고도 몇 시간을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지식과 제조법을 익힌 그다. 지금은 맛의 균일화를 위해 오랜 시간 연구와 실패를 거듭한 끝에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광주 곤지암 청국장공장에 발효실을 만들어 또 한번의 도약을 위한 시동을 걸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 많은 프랜차이즈 사업 분야 중에서도 어렵다는 청국장을 선택했을까. 그리고 그가 원하는 대로 과연 청국장을 세계화시킬 수 있을까. 게다가 올해 그려놓은 가맹점 활성화 목표는 꿈처럼 활활 타오를 수 있을 것인가. 그의 인생 최종 목표인 사회복지사업은 과연 언제쯤 가능한가.

▲  청국장과 보리밥 오기성 대표 ⓒ사진 이현석 팀장

청국장 전도사, 또 한번의 도약을 내딛다
모범생일 것 같은 외모, 그러나 장인정신의 고집이 어디에 가도 모범생일 것 같은 단정한 차림과 외모는 첫 만남의 경계심을 풀어헤쳐놓는 그만의 자산이다. 선한 이미지와 거친 프랜차이즈 CEO가 동시에 오버랩 되는 공간에서 묘한 매력들이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학자 타입의 진중한 눈매와 묵직한 턱 선에서는 그러나 고집이 영락없이 묻어난다. 장인들의 맥락과 닿아있다. 그러면서도 간간이 빚어 나오는 안경 넘어 날카로운 눈빛에서 사물을 읽어내는 힘이 만만치 않음이 전이된다. 솔직담백한 태도는 신뢰의 보증서다. 그의 구부리지 않는 언변과 동선이 그걸 웅변해 주고 있다. 
어린 시절 부유하지 못했던 그는 취업을 염두에 두고 인문계 대신 공고 전자과에 진학한다. 졸업 후 H전자회사에 취업한 오 대표는 1년 정도 다니다 그만 둔다. 승진단계에서 학력 간 차별이 심한 것을 안 그는 다시 공부해 취업이 잘된다는 대학 전자과에 들어간다. 학교 졸업 후 26살에 현대자동차 영업부에 지원한 그는 전자 대신 새로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주위에서는 다들 얼마 못갈 것이라고 한마디씩 했다. 모르는 사람들이 얼핏 보아도 그는 영업맨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자신을 잘 알고 있는 그는 자신이 이과보다 문과에 더 적성이 맞는다는 것을 평소에 느끼고 있었던 터였다. 현대자동차 영업부에서 중상위권 실적을 유지하며 대리까지 단 그는 운명처럼 그가 하고 싶었던 꿈을 가지게 된다. 사회복지사업이었다. 본인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불우한 청소년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꿈을 품게 된 것이다.
“어릴 적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악기를 배우고 싶었는데 집에다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집안 형편이 안 좋아서 사 달라든지, 배우고 싶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냥 스스로 알아서 판단해 접고 속으로 삭혔다. 그래서 나처럼 무엇을 하고 싶은데 할 수 없는 청소년들을 도와주고 싶은 생각을 가끔씩 하곤 했었는데 현대자동차에 입사해 5년이 되는 서른 살에 사회복지사업의 꿈을 본격적으로 갖게 됐다.”
그는 사회복지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관련분야 공부를 좀 더 해야겠다는 판단 하에 관련 대학 입학을 추진한다. 오 대표는 지점장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강남대 야간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한다. 평소 성실하게 일해 온 그의 품성을 알고 있던 지점장이 일과 학업을 병행하도록 허락해 준 것이었다. 대신 지금까지 쌓아왔던 그의 자동차 판매 실적을 이전과 똑같이 유지하라는 조건이 붙었다.

자동차 세일즈맨이 사회복지사업에 꽂히다
그의 나이 31살이다. 그는 행여 함께 근무한 직원들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낮에는 더 열심히 영업을 다녔다. 그의 꿈을 이루기 위해 더 시간을 아끼며 노력했다. 실적이 부진한 동료들에게 본인이 계약한 판매 건수를 양보한다거나 당직근무를 대신 서준다거나 하는 식으로 학업을 위해 저녁 4~5시에 일찍 퇴근하는 미안함을 대신했다. 그는 이곳에서 그의 인생반려자이면서 터닝 포인트인 아내와 장모님을 만나게 된다. 그는 32살 되던 해 캠퍼스 커플인 아내와 결혼한다. 
직장과 대학공부 그리고 결혼생활을 병행하고 있던 그는 직장생활 8년을 넘어선 2월 어느 날, 경기도 광주 곤지암에서 보리밥 가게를 하던 장모님한테서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향후 그의 인생의 변곡점이 될 운명 같은 전화였다. “대인 아빠, 사회복지사업하고 싶다고 했는데 직장 생활해 가지고 어디 할 수 있겠어. 여기 와서 가게를 한 번 운영해 보면 어떨까. 내가 해 봐서 아는데 직장보다는 나을거야.” 정곡을 찌르는 한마디였다. 막상 사회복지사업을 하기로 마음먹었지만 계획대로 진행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직장생활 10년 정도한 후 자금 좀 모아서 고아원을 차리는 게 목표였는데 고아원은 훗날 아이들한테 낙인이 찍힐 가능성이 많아 쉽지가 않다는 것이었다. 결국 자금이 많이 드는 복지사업 방향으로 가야만 했다. 자금이 많이 필요했다. 그래서 심적으로 고민을 하고 있던 차에 장모님한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이었다. 그는 결단을 내린다. 당시 대리 4년차인 그의 연봉은 5000만원을 넘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자녀 학자금도 회사에서 다 내주고 본인을 포함한 직계가족 병원비 혜택도 상당했다. 그런데도 그는 과감히 대기업을 포기하고 장사의 길을 선택한다. 
사업으로 큰돈을 벌게 되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직장 생활로 꿈을 이루기에는 너무 버거워보였다. 주저 없이 하겠다고 답했다. 문제는 아내였다. 아내는 직장을 그만두고 장사하는 걸 원치 않았다. 어려서부터 모친이 장사하는 걸 곁에서 지켜봐 왔던 아내는 하루 종일 가게에 묶여 있어야하고 아이들하고 놀아주지도 못하고 평생 쉬지도 못한 엄마의 모습이 안쓰러웠기 때문이었다. 극력 반대하는 아내를 그는 사정사정하며 마음을 돌리려 여러 날 애썼다.

예사롭지 않은 전화 한 통 “가게 한 번 해 볼 테야?”
장사를 하려는 게 아니라 돈을 모아 자신의 꿈인 사회복지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득했다. 결국 마음을 돌리는데 성공한 그는 2월 초 드디어 장모님이 하는 가게와 떨어진 곳에다 장소를 얻어 본격적으로 외식업에 입문하게 된다. 그는 장사 경험이 거의 없었다. 실수투성이였다. 오죽하면 매출로 발생한 돈이 다 장사해서 번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을까. 여기에서 식재료비, 임대료, 인건비 등이 다 빠진다는 것을 알 턱이 없던 시절이었다.
“사실 내가 외식을 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장모님 가게도 아내와 데이트 할 당시 바래다주러 가면서 보았는데 14년 전만 해도 지금보다 규모가 1/3수준으로 99~132㎡(30~40평) 정도였다. 주변의 땅 661㎡(200평) 정도가 달랑 있을 뿐이었다. 만일 장모님이 안 계셨더라면 아마 나는 외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2004년 2월5일, 하루에 8만 원 정도밖에 못 파는 소머리국밥집을 인수해 오픈했다. 기본적인 것은 장모님이 세팅해주고 나머지는 현장에서 몸으로 때웠다. 초창기에는 빌지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포스도 없었고 테이블 번호도 안 매겨놓아 그냥 여기, 저기 그렇게 불렀을 정도였다. 주문한 순서가 바뀌어 난리를 치는가하면 조금만 사람이 차면 고함을 쳐야만 했다. 시간이 좀 지나면서 가정주부였던 누나와 아내를 설득해 가게에 나오도록 요청했다. 초창기 가게에 참여했던 누나는 현재 오 대표와 협업관계 속에 국수, 샤브샤브, 김치찌개 등을 메인으로 하는 3개의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2월에 오픈한 보리밥 집은 겨울을 지나 봄이 되면서 활기를 찾아 매출이 오르기 시작했다. 초창기 132㎡(40평) 매장에서 하루 20만원하던 매출이 30만원, 50만원으로 오르더니 3개월에 이르니 드디어 100만원까지 판매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어떤 날은 손님들이 쉬지 않고 계속 들어와 무섭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쇄도했다. 재료가 다 떨어져 음식을 못 파는 상황도 자주 발생했다. 그러나 문제는 오히려 여기에서 움트고 있었다. 외식에 대해 잘 모르면서 본인 마음대로 운영을 해도 손님들이 계속 늘어나다보니 식당운영이 별거 아니라는 생각을 품게 된 것이다. 
장모님의 충고와 영업노하우들은 이미 귀에 들어오지 않고 겉에서 헛돌고 있었다. 오히려 장모님의 영업방식은 구식이고 우리 매장에는 맞지 않은 것 같아 그냥 내 방식이 더 옳은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가을을 지나 찬바람이 불면서 손님들이 줄어들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눈이 오는 날이면 매출이 하루 17만원까지 급감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럼에도 고집스럽게 바꾸지 않고 적자가 나는대도 3년을 버텼다. 봄, 여름에 좀 벌고 가을, 겨울에 적자보고를 계속 반복했다. 

 

▲청국장과 보리밥 오기성 대표 ⓒ사진 이현석 팀장

장모님 충고 무시하며 운영한 가게 결국 빚만 져
3년이 지나자 이번에는 아예 빚이 깔려있었다. 그때서야 후회가 물밀듯이 몰려왔다. 장모님 말씀이 하나같이 구구절절이 다 옳은 얘기였음을 나중에야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손님들에게 주는 음식은 아끼지 말고 계산하지 말라” “직원들이 돈 벌어다 주는 것이니까 잘해줘라” 
“손님한테 인색하게 굴면 고객들도 지갑을 인색하게 연다” 등등. 하지만 초창기 당시에는 이익이 나지 않는데 어떻게 아끼지 않을 수 있으며 직원들의 잘못된 점들이 자꾸 눈에 들어오는데 무작정 잘해 줄 수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고객들한테도 무조건 퍼줄 수만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식 초보자들이 겪은 경험을 그 역시도 3년이라는 긴 시간과 빚으로 수업료를 치른 셈이었다. 사회진출 후 처음 경험하는 실패였다. 잠시 방황에 빠졌다. 그냥 접을 것인가. 아니면 한 번 더 장모님을 멘토 삼아 도전해 볼 것인가. 그는 일단 부동산에 가게를 내 놓았다. 그런데 3년 동안 젊음을 바쳐 운영해 온 가게의 권리금을 한 푼도 계산해 줄 수 없다는 부동산 업자의 답이 돌아왔다. 게다가 학창시절 친했던 친구 2명이 필리핀에 이주해 호텔사업과 IT분야에서 크게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친구들이 사업을 함께 해 보자고 권유하던 차였다. 오 대표는 장고에 들어갔다. 어떻게 하는 게 최상의 선택일까. 그는 사회복지사업을 다시 떠 올렸다. 꼭 해보고 싶었던 사업 아닌가. 초심으로 돌아가자. 그래 다시 한 번 외식에 도전해 보자. 이번에는 장모님의 말씀을 그대로 현실에 반영하면서 운영하기로 마음먹었다. 거짓말 같은 변화가 일어났다. 고객들에게 식사 후 제공되는 후식을 마련하고 마음껏 먹게끔 했다. 고객들이 고객을 데리고 왔다. 부채는 6개월 만에 모두 청산했다. 
그러나 그를 시험하는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한다. 가게 운영 4년차 쯤 됐을까. 월급을 주고 난 다음날 가게에 나가보니 아무도 나와 있질 않은 게 아닌가. 직원들끼리 짜고 다들 그만둔 것이었다. 젊은 사장의 이런 저런 지시에 감정이 상한 것 같았다. 위기였다. 함께 <청국장과 보리밥> 음식점을 하다 의류업을 하기위해 가게를 떠나있던 누나에게 SOS를 보냈다. 그리고는 직접 주방에 들어가 메뉴 만드는 법을 메모해 가며 배웠다. 그는 외식업계에 입문한 2년 후부터 전 방위적으로 외식공부에 매달렸다.

실패 후 한 때 포기할 생각, 마지막 심정으로 시작
아는 게 너무 없어서다. 한식조리사자격증도 따내고 안성에 있는 축산물위생교육원에서 식육과정도 익혔다. 또한 대학교외식고위자과정, 프랜차이즈 과정 등 무려 22개 기관의 교육을 다니며 이수했다. 그가 주방에 들어가 어느 정도 메뉴를 만들 수 있었던 배경도 사전에 그가 공부해 놓았던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주방에서 메뉴를 직접 만들게 됨으로써 자신감을 한층 더 얻게 된다. 위기가 기회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4년째 접어들면서 식육과정에서 배운 것을 활용해 ‘삼겹살 무한리필’을 도입한다. 
청국장전문점은 보통 술손님이 없는 편이며 가을과 겨울에 매출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이 부족한 점을 극복하기 위해 고기를 과감히 도입키로 한 것이다. 돼지고기를 잡으면서 나오는 항정살, 가브리살, 갈매기살 같은 부위는 따지지 않고 먼저 오는 고객들에게 제공했다. 단골 고객들이 늘어나면서 입소문을 타고 방송사에서도 찾아와 촬영해 갈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그의 사업수완이 갈수록 빛을 발휘해 갔다. 
그는 곤지암 가게가 맛집으로 인기를 끌고 수입도 안정적으로 이뤄지자 사업 확장을 위해 서울 1호점을 2009년도 5월에 고향인 봉천동에서 83㎡(25평)으로 오픈한다. 수중에 있던 2000만원이 실투자금액의 전부였다. 인테리어와 간판 그리고 주방 등은 곤지암 가게 운영하면서 인연을 맺었던 업자들이 모두 외상으로 해줬다. 오 대표의 가게 운영을 5년 가까이 곁에서 지켜본 이들이어서 흔쾌히 허락해 준 것이었다. 그의 능력과 성실한 품성을 잘 알아서다. 그리고 직원들도 젊은층으로 선별해 구성했다.

외식 등 22개 기관의 교육 다 받아, 적절하게 활용해
다음 프랜차이즈 사업을 대비해서다. 5000만원 가까운 빚을 6개월만에 다 갚았을 정도로 장사가 잘 됐다. 서민문화권에서의 테스트는 4000만원대의 매출을 일으키며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오 대표는 이 여세를 몰아 봉천동 오픈 6개월 후 철산동에 3번째 매장을 오픈한다. 역시 인테리어와 주방 그리고 간판 등은 외상이었다. 이곳은 상권은 괜찮은데 입지는 매우 엉망이었다. 최악의 198㎡(60평) 지하매장이었다. 그는 속으로 다짐했다. 이 매장에서 살아난다면 어떤 지역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 매장은 초창기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3000만원대의 매출을 기록하며 성업 중이다. 
현재는 직영에서 가맹점으로 돌린 상태다. <청국장과 보리밥> 매장 중에서도 오 대표에게 가장 효자 매장은 단연 청담점이다. 2010년 4월에 오픈한 이 매장은 그가 지방상권 곤지암점, 서민상권 봉천점, 입지가 불안한 철산점 등에 이은 고급 상권 테스트 매장이었다. 165㎡(50평) 반 지하에다 하루 20만원 팔던 장어집으로 권리금이 거의 없이 들어갔다. 월 1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효자매장으로 거듭난 청담점은 현재 만 6년 됐는데 초창기에는 평일 120만원 주말에는 50만원 정도의 매출을 기록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매장이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평일과 주말의 매출이 비숫해지더니 매년 25%씩 증가하기 시작, 대박 매장으로 거듭난 것이었다. 
청담점의 대박으로 대치점, 수서점이 잇따라 오픈되면서 ‘청국장과 보리밥’ 브랜드는 점차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다. 그러면 <청국장과 보리밥>이 청담동에서 성공하게 된 비결은 무엇일까. 
“장모님이 늘 그러셨다. 항상 무엇을 더 고객들에게 줄까를 고민하라고 말이다. 사실 청담동은 지역의 특성상 ‘무엇을 더 줄까’라는 문화가 없는 곳이다. 그런데 우리는 고객들에게 계속 공짜로 무엇을 주었다. 삶은 감자, 청국장 과자, 미숫가루 슬러시, 우리밀로 만든 강정, 청국장 쌀과자 등 평범치 않은 후식을 내놓고 마음껏 무효로 들라고 한다. 아마도 청담동에서 8000원 받고 이런 후식들을 내 놓는 가게는 결코 없을 것이다.”

청국장이 청담동에서 대박 터트리며 강남을 접수하다 
2년 전부터는 8000원하는 청국장 식사메뉴를 임산부들에 한해 아기를 낳을 때까지 무료로 제공하는 이벤트를 실시하고 있다. 청국장은 시중에서 유통되는 항암제의 면역력을 50%까지 갖고 있는 것으로 보고돼 임산부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음식으로 평가받는다.
<청국장과 보리밥>매장은 입과 소문으로 퍼져 가맹점을 내달라고 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점포가 22개까지 생겼다. 이들 점포는 보통 132㎡(40평)에서 264㎡(80평)대의 대형 매장들이 주류를 이룬다. 하지만 올해는 주방을 축소시켜 본사에서 중앙집중식(CK)으로 운영해 66㎡(20평)형대의 점포들도 가맹점으로 오픈시켜줄 계획 하에 시스템을 완비했다. 물론 업종 전환도 가능토록 준비를 마쳤다. 
오 대표가 오래 전부터 심혈을 기울여 공을 들인 부분은 청국장 맛의 균일화다. 발효 정도에 따라 맛의 차이가 나는 청국장의 특성을 오랜 시간을 두고 연구와 실험을 거듭한 결과 거의 80%에 이를 정도로 균일화하는데 성공, 가맹점들간 청국장 맛의 차이가 거의 사라지게 했다. 게다가 최근에는 가맹점들의 관리를 타이트하고 디테일하게 하기위해 4명의 직원과 함께 외식사업부를 청담동에 별도로 마련, 직영점 관리와 가맹점들의 애로를 덜어주고 있다. 숍인숍 매장에 들어가는 청국장 관련 상품도 계속 출시해 가맹점들의 매출 증대에도 일조하고 있다.

66㎡(20평)형대의 매장도 창업 가능토록 시스템 구성해
올 초에는 토마토 고추장 특허를 갖고 있는 경기도 광주시로부터 기술을 이전받았다. 이를 기회로 올해 토마토를 생산해 토마토 고추장을 매장에서 판매할 예정이다. 이런 방식으로 궁극적으로는 매장 매출의 약 30% 정도를 숍인숍에서 발생토록 할 예정이다.
사회복지사업을 위해 외식업에 뛰어든 오 대표는 올해를 도약의 해로 잡았다. 그동안 물밑에서 꾸준히 회사와 시스템을 가꾸고 다듬어 왔기 때문에 이제는 해볼만 하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그의 진중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매는 올해 어디쯤 응시하게 될까. 
“그동안 열심히 준비했다. 무엇보다 기본을 많이 다졌다. 나 역시 크고 작은 CEO과정을 22개나 듣고 공부했다. 우리회사는 농업회사법인으로 6차산업의 기업이다. 농업·식품·외식·유통 등을 아우르고 철저하게 연구하며 나아갈 것이다. 그래서 훗날 가맹점주들 입에서 고맙다는 말이 꼭 나오도록 노력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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